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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Apr 19. 2021

너를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곳

그해 여름


  그제는 네가 유독 좋아했던 바닷가  술집에 다녀왔어. 내가 기억하는 네가 여전하다면, “부러워! 나도, 나도 거기 가고 싶어.”라고 말할  뻔해서 괜스레   같은 얼굴이 됐지 뭐야. 사실은 좋은 핑곗거리가 하나 필요했거든.  아무래도 아직 너를   잊은  같아, 라는 문장으로  글을 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할 테니까. 나는 아직도 너를 생각하는 마음보다  자존심이 조금  중요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모양이야.  못났지. 내가 봐도 못난 이런 모습에 네가 치를 떨며 떠난 것일 텐데, 나는 그때보다 한참은  못난 어른으로 커가고 있어.

  아무튼, 그 바닷가 술집의 창가 자리 기억해? 오후 5시쯤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정신없이 마시다 보면, 수평선 저 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그 자리 말이야. 우리가 그 자리를 지독하게 고집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잖아. 잘 익은 귤색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자면, 꼭 어떤 무거운 일이든 아무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곤 했어. 뭐랄까,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어길 수 없는, 거스르래야 도무지 거스를 방도 없는 영원을 약속한 것만 같은 느낌.

  맞아. 삼백 년째 나이테를 무럭무럭 키워가고 있다는 소나무도 거기 있었잖아. 그곳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수호목이라고 부른다 했어. 그래서였을까. 그때의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나무에다 대고 이런저런 소원을 꽤 간절한 표정과 손끝으로 빌곤 했었어. 비록 내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방인일지라도, 삼백 년씩이나 이곳을 살아왔다면 그 정도 아량은 너그러이 베풀어줄 것만 같았거든. 지금 보니 참 건방진 착각이었던 것도 같아. 내가 뭐라고, 내가 가진 간절함이 도대체 뭐라고. 너와 꼭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진 날의 소망이어서 그랬을까. 조금만 더 가까운 날의 보다 현실적인 내용의 기도였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당장 내일의 우리가 오늘보다 더 사랑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어야 했던 걸까.    

  별안간 내가 숟가락을 높게 들어 오후 7시쯤의 석양을 한 숟갈 퍼내는 시늉을 했을 때, 도대체 그게 뭐라고 네가 물개박수까지 쳐가며 아이처럼 꺄르르 웃어줬을 때, 그때 나는 어쩐지 이게 꼭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행복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만큼이나 행복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만약 정말로 야속한 꿈이라면 차라리 영영 깨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어. 그 깊은 잠의 바깥세상에서는 내가 죽은 사람이 되어도 좋으니, 이곳에서만큼은 너와 오래오래 온갖 해로움을 잘도 피해가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 그러니까 반은 맞고 반은 완전히 틀려버린 반쪽짜리 망상이었던 거야.

  결국 너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사랑을 나눴던 그 순간들은 전부 꿈보다도 훨씬 꿈만 같았던 순간으로 사라졌고, 영영 깨어나지 않는 깊은 잠 속에서 너와의 백년해로를 이루는 일 따위는 한 줌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날 이후로 나는 내게 수갑처럼 채워진 이 속박 같은 삶을 용케도 잘 살아내고 있어. 처음에는 정말이지 손과 발이 한데 묶인 것처럼 말을 듣지 않다가도, 금세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세수도 곧잘 하고 밥도 우걱우걱 잘 챙겨 먹게 되더라고. 그리고 며칠 전에는 녹이 잔뜩 슨 수갑을 손쉽게 풀어내고는, 이렇게, 이렇게 두 팔을 높게 들어 기지개까지 켤 수도 있었어. 정말로 너는 더 이상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이 아닌 게 되어버렸었거든. 진짜야. 그만큼 오래되었으니까. 무려 2년이잖아, 2년. 너무 억울한 거지.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이제는 정말 다 잊은 것 같은 오늘이었는데.

  그해 여름 우리가 함께 맡았던 비릿한 밤바다 냄새와 지겹도록 들어대던 검정치마의 노래. 그리고 조금 무서울 정도로 세차게 퍼붓던 장맛비를 피해 들어간 지하의 작은 와인바. 나는 여태 그 흔한 걸음 한번 내딛지 못한 채 이 모든 것들에 발이 세게 묶여 있고, 너는 어딜 그렇게 정신없이 바삐 가기에, 하필 내가 다 잊었다 말 하는 순간순간마다 특별했던 것 하나씩 보란 듯이 흘려놓는 걸까. 그것들은 또 어떤 재주를 부려 단 하나도 무덤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 그리운 순간들이 영영 죽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나는 오늘도 내 스물세 번째 생일날 네가 선물해줬던 산세베리아에 물을 줬어. 언젠가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올지 몰라 적당한 이름을 붙여주지는 못했지만, 너를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곳에서 야속하리만큼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모양이야

  꽤 높게 자란 산세베리아, 몇 번이나 버리고자 했던 사진 수십 장, 창고 정리 중에 난데없이 쏟아진 편지 봉투, 틈틈이 찾아 듣는 검정치마의 음악, 네가 혼자 떠난 여행지에서 작은 엽서에 그려 선물해준 너의 시선들, 네가 유난히 좋아했던 체리 맛 맥주, 직접 만들어 보내줬던 쿠키, 우리가 자주 가던 바닷가 술집, 네가 슬플 때면 나 몰래 잠시 왔다가 말도 없이 돌아갔던 우리 집 앞 나무 벤치, 모델 놀이를 하며 진종일 서로의 사진을 찍어댔던 그 대나무 숲, 파스타를 지나치게 가득 담아줬던 지하의 와인바, 관객이 열 명 남짓이던 작은 공연장에서의 기타 소리, 함께 앉아 색연필로 시답잖은 그림이나 그려대던 호수공원 앞 카페, 참새처럼 쉴 새 없이 재잘대던 너의 입. 그 외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장면들. 정말이지 너를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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