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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r 21. 2020

봄비가 그리워서 봄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계절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언제나 그랬듯 또 봄이 왔다. 여느 이들의 삶처럼 얇은 이파리들이 여기저기서 온몸을 비틀고 구부러트리며 갸냘픈 존재를 애써 과시한다. 아직 살갗에 사고인 듯 부딪히는 바람이 완연한 봄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좁은 콧구멍을 애써 비집고 들어오는 무리와 동떨어진 바람에는 분명한 봄내음이 넘치도록 묻어난다.

  그 누구에게도 봄이라는 계절을 깊숙이 애정한다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늦겨울과 봄의 초입 그 경계에 발을 딛고 호흡을 할 때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폐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잔뜩 팽창한 기포 같은 것들이 불규칙적으로 제 몸을 터트리는 진귀한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그 파동은 이내 곧 심장의 미끈거리는 표면으로까지 번져, 나라는 사람 전체를 뒤흔들고 쥐어짠다.
  그러나 나는 그 첫사랑처럼 어색한 느낌을 싫어한 적 없고, 오히려 그 감정을 감격스럽다 이해하고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한참을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무르곤 한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서 그곳에 가만히 정지한다. 꽤 오랜 시간 만나기를 고대했던 사람을 갑작스레 마주한 것처럼. 쌓아둔 말들이 너무 많아, 그만 그것들을 발치에 모두 쏟아버리고 마는 사람처럼.

  봄은 과연 태초부터 따뜻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따뜻함과 포근함을 그 어떤 소원보다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영혼들의 기도가 그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전자라면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감히 자연의 섭리 앞에 반기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후자라면, 춥고 외롭고 안쓰러운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 지구에 따뜻한 봄을 드리우게 한 것이라면, 아마도 나는 밤이 새도록 그들을 저주하는 말들을 입 밖으로 열심히 내뱉을 것이다. 사랑이란 짓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봄과 이 계절을 탄생시킨 이들의 이름을 꽤 오래도록 기억하며 원망할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이면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박동만을 유지하던 심장이, 봄이 가까워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날뛴다. 티 하나 묻지 않은 순백색 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잡힌 물고기의 몸부림은 그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이는 곧 사랑을 하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생각은 한동안의 내 삶을 모조리 마비시킬 만큼이나 강한 힘을 갖게 된다.
  나는 또 그 섣부르고 잔혹한 감정에 휘둘리게 될까. 그리하여 또 지난 여러 봄과 같은 비극에 닿게 될까. 그래. 어떤들 그리 큰 상관은 없다. 우리가 사랑이 빠지게 되는 일이 꼭 계절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으며, 황홀한 사랑 뒤에 운명인 듯 뒤따르는 아픔과 침묵은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일 테니까. 실은 내 사랑이 산산이 부서진 것에 대한 책임을 봄에, 그 봄이 탄생하게끔 한 이들에게 묻는 것은 나의 이기심일 뿐이니까.
  봄은 아무런 죄가 없다. 곧 죽어도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살겠다면, 흠뻑 맞아도 좀처럼 젖는 법이 없는 창밖의 봄비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게 사실이고, 그게 내가 그간 쉬지도 않고 낡은 물레로 촘촘히 짜왔던 인생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잔뜩 부푼 먹색 구름이 이 세상에 무한한 빗금을 그어대고 있다.


  내가 호기심 많은 학생처럼 눈을 크게 뜨고서 일본말로 ‘나는 비가 좋습니다’를 어떻게 발음하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전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교사처럼 싱긋 웃으며 ‘오레와 아메가 스키데쓰’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이 짧은 문장을 그때의 음성과 어감이 너무 아름다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 내가 완벽히 숙지하고 있는 유일한 일본어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의 멀끔한 새 옷.
  새삼 그때 나는 왜 그냥 비가 아닌 봄비가 좋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이 계절처럼 내 목을 휘감았다. 나는 왜 그녀에게 봄비를 일본말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묻지 않았을까. 그러는 나는 왜 여태껏 봄비가 일본말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찾아보려 한 적이 없는 걸까. 언젠간 봄이라는 계절에 그녀를 다시 만나,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을 수 있다는 막연하고도 행복만큼 희박한 가능성을 믿고 있는 탓일까. 내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봄비를 일본말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그녀가 그때처럼 싱긋 웃으며 그에 대한 대답을 건넬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걸까.

  내게 봄이 온다는 건, 우리가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서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온다는 것과 같다. 내가 봄이 올 때마다 괜한 설렘에 온 생애를 맡기면서도, 한 편으로는 처절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겠다. 쏟아지는 잠을 참듯 우둔하게 기다렸던 기회가 내게 주어짐과 동시에, 그 기회가 유난히 가파른 내 손금을 물길 삼아 줄줄 흘러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봄은 내게 그리움이고 하나뿐인 희망이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필히 주어지는 고맙고 유리한 기회이자, 작은 실수로도 검은 눈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마는 하얀 불꽃이다. 이제 곧 그 반쯤 놀라운 기회가 온다. 그녀에게 봄비를 일본말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온다. 그러니까 이제 곧 이런 내게, 둔중한 이름을 상실한 우리에게 그 봄이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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