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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y 18. 2020

죽을 만큼 사랑한다더니 내게 왜 그랬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네 머리칼 한 올 남지 않은 이 삶의 바닥에
하다못해 흉기를 든 찬 기운까지 들기 시작하더니
끝끝내 목숨을 잃은 표피 세포들이 너저분히 나뒹굴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꼭 피칠갑인 후들거리는 손과
검붉은 옷가지 같은 게 필수적인 건 아니지

내 마음은 아직 한창때인 저녁 공기라
결단코 밝아올 기미 한 점 보일 리 만무하고
그나마 뒤틀린 달빛 같던 너마저 수명을 다한 지금
질끈 감은 눈처럼 사방이 칠흑인 심해에 나는 온 마음이 잠겨 죽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물고기들의 뾰족한 이빨에
숨 막히는 마음이 애처롭고도 까맣게 찢기어 가는 중에도
말을 침처럼 툭 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입만을 필사적으로 오므렸다 피며 나는

죽을 만큼 사랑한다더니 내게 왜 그랬습니까?
했다

그렇다 할 예고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것만으로
사람은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거다

혹여 두고 온 짐짝이 거추장스러운 사랑일 경우에는
그 모습이 참 이도 저도 아닌 게 우스꽝스러워진다

오늘 나는 허옇게 마른 얼굴로도 불쏘시개 같은 태양의
광활한 관할 구역을 용케도 잘 피해 다녔다

사랑하는 사람이 구색을 제대로 갖춘 이유 같은 것과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을 일절 남겨두지 않고 떠난 이곳에서
진종일 엇비슷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아등바등 쏘다니다

기어코 나는 빈손과 다 해져버린 두 발을 잔뜩 비웃으며
더 낮은 곳을 향해 헤엄치듯 숨 가쁘게 뛰어내렸다

<죽을 만큼 사랑한다더니 내게 왜 그랬습니까>, 하태완

2020. 5. 18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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