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태완 May 20. 2020

가장 사랑하는 색이 맡은 배역은 죽음

초록을 연기하는 것들


초록을 연기하는 것들은 죄다 죽는다
초록색 초침은 고작 째깍거림 육십 번 만에
머물던 이를 찌르고 짓밟고야 마는 거다

초록색 산새는 부러진 다리를 헐값에 내다 팔더니
힘껏 앉은 그 자리 그대로 나무가 되었다

초록색 무지개는 다른 색을 모두 잡아먹고도
허기가 지는 바람에 그새를 못 참고 투신했다

초록색 비구름이 화재 현장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잔뜩 머금은 물기를 주룩주룩 털어내다 발을 헛디뎠다

초록색 입술이 겨울새 갈라진 틈에서 싹을 틔우고
게으른 농부가 가을 즈음 횡재라며 수확한 것은
심어두기만 하면 사람이 자란다는 둥근 심장이었다

농부에게 기생하며 무럭무럭 자라던 초록색 사람이
끼니를 걱정하던 건넛마을 개장수에게 납치되어
펄펄 끓는 물에 온몸이 잠기기 직전 토해낸 말은

다름 아닌,
당신이 나의 아버지인가요? 였다

초록색 수건으로 신음하며 오래된 땀을 닦아내니
총성 한번과 창문을 뚫은 총알이 내게 들어왔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쿨럭쿨럭
초록색 피를 양껏 뿜어댔다 축제의 폭죽처럼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다며 손에 쥔 숟가락은
초록색 곰팡이를 이만큼 사육하고 있었다

그만 나는 슬픔이 지나간 다리를 끊어야지
이렇게 날카로운 것으로 진종일 내려찍어야지

끝끝내 끊어진 다리가 마을 하나를 삼킬 정도의
초록색 흙먼지를 일으키며 깨갱하고 쓰러졌다

잎맥이 지나치게 옅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심폐소생술을 시작하는 초록색 손들이 우글우글하다

으깨지는 풀잎들은 때때로 약으로도 쓰인다던데
결국 죽은 것이 죽을 사람을 살리는 거다

태초부터 초록일 수는 없는 거니까
결국 우리는 모두가 초록을 연기하는 거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결국 전부 다 초록을 연기하다 죽게 되는 광대인 거다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걸어갔다 소문처럼
볕이 몸을 관통한 초록색 라디오카세트처럼

두세 발자국 더 가던 노인은 무작정 얼굴을 뜯어내더니
초록색 가면을 발치에 내팽개치며 죽었다
무너진 지붕을 보금자리 삼던 물줄기처럼

마음속에 핀 꽃들은 입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죄다 초록색을 연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후후 불어 털어낸 것은 죽은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중에 꼬리가 달린 것을 제외하면 전부 초록이다

어젯밤 나는 이제부터 초록으로 살아갈 거라며
호언장담을 하고서 호화로운 빈집을 뛰쳐나왔다

그러니 이제는 부담 하나 갖지 않고서
내가 죽은 뒤에야 전해질 사실 하나를 알려줄 거야
초록을 연기하는 것들은 죄다 죽게 된다니까
아주아주 잔혹하고도 그럴 법한 모양으로

_
<가장 사랑하는 색이 맡은 배역은 죽음>, 하태완

2020. 5. 19 씀.

작가의 이전글 죽을 만큼 사랑한다더니 내게 왜 그랬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