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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y 29. 2020

허연 죽과 까닭이 있던 오늘

미열


그제부터 잦던 기침이 기어이 미열을 키워
아침께 뜨여진 두 눈에선
지난 일이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러는 나는 거실로 나가 끓는 물에 여름맞이
제철 나물 데치느라 여념이 없는 어머니에게
지난겨울보다 더 허연 죽을 한 그릇 끓여달라
간곡한 말투와 구겨진 표정으로 부탁하고는

내게서 삐져나간 지난 일들을 좇아
볕이 가장 잘 드는 부엌의 한 귀퉁이 창문에
뺨이 거의 닿게끔 가까이 앉아서
저 먼발치의 밖을 훤히 내다보았습니다

구름보다 산봉우리가 더 높게 누워 있는
몇 없을 날들이 쓰라리게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절경을 이렇게 올려다보며
저것을 과연 구름과 안개라는 이름 중에
어떤 발음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다투었습니다

나는 순백의 구름인 듯 청쾌한 그 애를
이 손끝에 한 번 묻혀보려 무던히 애썼고

그 탁월한 노력은 기어이 나와 내 마음을
그 애를 다 갖고도 남을 만큼 높은 곳으로
아주 높고 건방진 곳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해냈다는 쾌락과 우월감에 끈적하게 젖어
그 애를 내려다보며 나는 안개가 너무 짙다
이맛살을 성난 파도처럼 찌푸리며 투덜거렸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를 통째로 들어내도 다시 없을 실수였습니다

나는 늘 해를 등진 짙은 청록의 나무여서
어둠이 쓸데없이 길고 그늘이 비뚤어져
그 애가 똑바로 누워 쉴 자리 하나 만들지 못했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내어주신 흰죽에는
문드러진 새우살이 잔뜩 떠다녔고
그것들은 숟가락질 몇 번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맛있었다는 나의 칭찬에
어머니는 내일 같은 웃음을 입가에 섞었고

나는 내가 만약 좀 전의 말처럼 죽는다면
그 사인死因은 지질한 후회와 먼 그리움일 거라
저 멀리 옛 애인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제아무리 뒤돌아본들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까닭이
빈 죽 그릇을 앞에 둔 오늘 아침에는 있었습니다


_
<허연 죽과 까닭이 있던 오늘>, 하태완

2020. 5. 28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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