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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Jun 01. 2020

시퍼런 바다의 물풀

나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퍼런 네가


나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퍼런 네가
바싹 마른 장작에 끈적이게 달라붙어
방금 막 뜬 태양처럼 피곤하게 타올라
너의 귀한 손금을 아주 길게 잡아당겨
나의 둥근 목에 꽉 조여 묶어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들어 사는 건물이 붕괴하는 거야
지진은 일절 없었는데 저기 저 멀리서부터
어젯밤 꿈보다 깊고 어두운 시퍼런 바다가
있잖아 두 팔을 벌리고서 통째로 밀려와
내가 놓친 손금을 너는 황급히 둘둘 말아
나와는 너무 반대편을 향해 달려가고 말아
나는 네가 밀려오는 바다를 겁낸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우리 사이에는 그것보다도 높은
거대한 유리 벽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지
시퍼런 바다는 내가 있는 쪽으로 거칠게 밀려오고
아무래도 그 벽을 넘기에는 조금 모자란 모양이고
그러니까 네가 삼켜지는 일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이런, 잠겨 죽는 건 나 하나뿐이었던 거야

나는 숨이 막히면서도 너를 사랑한다 했었지
너는 그런 나를 안타까워하는 듯하면서도
저 멀리로 굴린 발을 멈추려 하지는 않았어
온몸을 가득 채운 물이 달그락거리며
내 안을 딱딱하게 굴러다닐 때에도 너는

너는, 너는, 너는, 나를,

짙은 녹빛의 물풀들이
몸의 말단에서부터 자라
이윽고 눈과 코와 입까지 뒤덮고
나는 더 이상의 숨을 내뱉는 일 없고
상처 입은 물고기들의 숨을 곳이 되었지
결국에는 상처 입은 것이 상처 입은 것을
이렇게 이렇게 감싸주는 게 이생의 순리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지나치게 탐닉되면
결국에는 바다의 가장 깊은 곳으로 가게 되지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되지

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시퍼런 네가
나를 심해처럼 와락 삼키고 뱉지를 않으면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저 물풀이 되지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조리
무수한 애정 속에서도 젖을 줄을 몰랐지

<시퍼런 바다의 물풀>, 하태완
2020. 5. 3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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