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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Oct 02. 2020

더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2020. 10. 1

  더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그래도 지나가다 한번 마주치고 싶기는 합니다만. 서로 사는 세상의 간극이 꽤 길고도 너무 넓게 벌어진 모양이에요. 갑자기 쏟는 비에 젖은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잊지 말고 우산 챙겨요. 이제야 그 삶에 닿은 행복을 아주 오래 만끽하세요.
  우리 가끔 눈물 나게 행복했고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을 공유했잖아요. 많이 고마웠다고요. 이런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줘서. 다 이해해. 죽으려거든 내 옆에 와서 아무도 모르게 그러니까 나만 알 수 있게 죽어버려, 라고 말해줘서. 그래도 당신 그 한 뼘도 안 될 것 같던 곁을 무덤 삼는 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당신 또한 남은 삶의 여유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우리가 만약 비슷한 시간대에 숨이 멎는다면 조금이라도 먼저 죽어버리는 건 꼭 당신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게 있었어요. 우리 둘 다 용케도 아직 살아내고 있지만요. 죽지 못해 산다는 애어른 같은 말을 툭 던지는 당신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문득 웃기네요. 그 손목에 슬쩍 내비치던 붉은 테도 함께 이 눈앞으로 둥둥 떠다녀요.
  나도 그런 건 아직 여전한데요. 다만 조금만 더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짧은 시일 내에 내 전부를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은 사람이에요. 알잖아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한 줌의 겁도 집어삼키지 않는 나라는 것을. 반쯤 미친놈처럼 그 감정 하나만 좇는 우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금 당신이 더 배려 깊은 사랑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로 당신보다 더 섬세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이미 당신을 훌쩍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달리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꼭 건네야만 하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또 한 번의 여름이 달리는 기차 바깥의 풍경처럼 어림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역시 우리는 틀리지 않았나 봐요. 퍽 안타깝지만 영원한 여름은 정말이지 없는 모양입니다.
그립다기보다는 산 사람의 윙윙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내게 줬던 산세베리아는 무서울 만큼 잘 크고 있어요. 문샤인이었던가요. 가끔은 정말 달빛처럼 내 주변을 은은하게 품기도 합니다만, 당신이 내내 아프지 말았으면 하는 이 마음이 어떻게 거기까지 닿기는 하겠습니까.
  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길다. 그래도 영원하지는 않을 거래. 헛된 기대는 아무도 품지 않기로 하자. 아니다. 그래도 이 여름 하나쯤은 영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분명 영원할 거야. 그렇고말고. 당신이 여름이면 습관처럼 종종 내뱉던 말이잖아요. 그럼에도 우리가 그때 그토록 확신하던 영원한 여름을 나는 끝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만 잘 가요. 완연한 겨울에 닿으면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디 조심히 가요. 멋진 사람이시니 어디로 가든 좋을 테지만요.
  당신의 이름은 이제 이곳에 두고 갑니다. 지독히도 어려웠던 길이었고 자세한 메모 따윈 하지 않았으니 다시 찾으래야 절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각자 삶의 범주 안에 우연히라도 발 들이는 일 없기를. 앞서 말한 마주침은 다음 생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를. 울컥하는 마음은 주책이나 다름없으니 그저 잘 지내고요. 당신이 정말 행복했으면, 정말로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이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또 놀러 올게요. 그럴 거라면 숫제 그때 확 죽어버릴 걸 그랬나요. 아무튼 당신의 그 여정에는 행복만 있었으면 해요.

2020.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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