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태완 Oct 06. 2020

네가 바다와 숲으로 오던 때

화들짝 놀랄 차가운 낭만으로


내게 사랑이 오던 때였다

부서진 석양 발치로 몰고 오는 저녁 바다처럼
화들짝 놀랄 차가운 낭만으로

집 앞 골목에 피어난 제비꽃처럼
문득 반가운 얼굴로 네가 내게 왔다

갑작스러운 사랑은 늘 주의해야 하건만
그럴 겨를도 없이 나는 발을 빠트리고
무릎을 굽혀 앉아 너를 상냥하게 맞았다

곧 죽어도 아쉬울 게 없던 삶에
억겁의 희망이며 행복이며 하는 것들을
양손 가득 들고서 내게 온 사람

몇 날 며칠 쏟던 비도 때마침 그치고
내 앞에는 불안에 덜덜 떠는 내 눈을
한 시도 놓치지 않은 네가 있었다

묘하게 어지러웠던 그 날 이후로
꿈속이라도 괘념치 않고 불쑥 찾아오는
너의 당찬 행보가 내 생애를 거닐었고

나는 네가 남긴 걸음걸음마다
코를 깊게 박고 킁킁거리며
활짝 웃는 얼굴로 네 뒤를 쫓았다

약속인 듯 정해놓은 우울도 모두 잊고
너를 받아들이는 데에만 온 힘을 쏟았다

노랗고 빨간 이파리가 만개했던 날이었다
내 삶에 더는 죽음이 없게 해달라
다신 없을 간절함으로 나는 빌었다

네가 내게 짙은 내일로 왔고
나는 그에 새 생명을 얻었다

어제처럼 아버지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어머니와 햇사과를 깎아 먹는 평범한 일상으로
용케도 죽지 않고 다시금 돌아왔다

초록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휑한 갈색 숲에
노루며 청설모며 하는 것들이 뛰어다니고
연녹의 새순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네가 바다와 숲으로 오던 때>, 하태완

2020. 10. 6

작가의 이전글 더는 사랑이 아니랍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