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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Feb 24. 2021

첫눈

네 첫눈을 내게 자랑해줘


  언젠가 네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가. 첫눈이 오면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 눈을 맞자고. 그래서 둘 중에 누가 본 첫눈이 더 낭만적이었는지 자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그때는 그 말이 그저 귀여운 장난처럼 느껴졌거든. 그래도 첫눈은 함께 맞아야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는 내 물음에 너는 짧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잖아.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때부터 너는 나름의 방식으로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슬픈 사실을. 자랑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던 건 마지막 배려였을까. 맞아, 너는 사랑이 조금씩 식어가는 순간에도 따뜻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거야. 내가 아주 싫어지지는 않았던 거라고 마음대로 착각ᄒ도 될까. 내가 조금이라도 덜 슬프기를 바랐던 거라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너 몰래 눈이 더 예쁘게 내리는 곳을 슬쩍 찾아보곤 했었어. 넓게 탁 트인 공원과 가로등이 서너 개 켜져 있는 밤의 주황빛 골목 중에 어떤 곳에서의 첫눈이 더 낭만적일까, 하고 잔뜩 고민했다니까. 이거 봐 이거 봐 내가 찍은 첫눈 사진이 훨씬 좋은 겨울 같아. 네가 찍은 사진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단 말이지. 이번 자랑 놀이는 내가 이겼다고 치고, 자, 여기 입술에다가 네가 먼저 키스해줘. 나는 가만히 서 있을 테니까. 일종의 벌칙이야 벌칙. 쑥스러워도 어쩔 수 없어.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거든, 하면서 줄곧 너와 알콩달콩 부대끼는 상상을 했었어.
  오늘 아침에 이만큼 부은 눈 비비며 창밖을 내다보니 드디어 첫눈이 오더라. 네 말대로 우리 정말 다른 곳에서 첫눈을 맞게 됐어. 이번 놀이는 무조건 내가 지고 말 거야. 어쩌겠어. 어디를 어떻게 본들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은 장면뿐이잖아. 그러는 거긴 어때. 부탁이니까 네가 본 첫눈은 얼마나 낭만적이었는지 내게 자랑해줘. 벌칙이란 벌칙은 내가 다 받아도 괜찮으니까, 네가 본 그 첫눈 자랑 한 번만 내게 해줘. 내가 본 첫눈은 온통 쓸쓸함 뿐이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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