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주머니 속 작은 여름의 사정

휘어진 카드와 녹아버린 립밤

by 리은


‘오늘 나의 활동 반경은 어느 정도인가. 걷는 시간이 긴가,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가. 주머니가 볼록해져도 상관없는 착장인가. ‘


겨울 아침은 늘 이런 사소한 물음들로 현관문 앞에서 시간을 조금씩 잡아먹는다.

딱히 중요한 결정도 아닌데, 왜인지 매번 고민하게 된다.


잠시 서 있다가 결국 가장 큰 사이즈의 ‘그것’을 하나 집어 든다. 이쯤 되면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냥 답이 정해져 있는 셈이다. 포장지를 뜯고 사각사각 소리가 날 때까지 몇 번 흔들다 보면, 안쪽에서 미지근한 열이 올라온다. 나는 그걸 외투 주머니 안쪽 깊숙이 밀어 넣고 집을 나선다.


문제는 이 얇은 부직포가 가끔 지나치게 성실하다는 데 있다.

주머니 속에서 혼자 열을 올리다 보면, 결국 사달을 내고야 만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 체크카드를 꺼냈을 때였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어딘가 이상했다.

가운데 부분이 반듯하지 않았고, 얇게 물결치고 있었다.


기계에 카드를 꽂으려던 직원이 움찔하며 나를 힐끗 봤다.

“이거 좀 휘었는데요?”


나는 잠깐 카드를 내려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게 제 주머니가 좀 뜨거웠나 봐요.”


기다리는 뒷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괜히 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조심스레 결제 여부를 확인한 뒤 얼른 카드를 건네받았다. 다행히 결제는 됐다. 카드를 다시 쥐자, 눅눅한 미지근함이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괜히 바지에 한 번 문질러 닦고 반대쪽 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립밤의 사정은 더 처참하다. 건조한 입술에 바르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고체여야 할 내용물이 끈적한 액체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겨울 길바닥 한복판에서, 내 주머니 속만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순간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손에는 휘어진 카드, 다른 손에는 흐물해진 립밤.

그 얇은 부직포 주머니가 나를 이렇게까지 배신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휘어진 카드는 손으로 대충 눌러 펴보고, 녹아버린 립밤은 집에 가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 다시 손을 찔러 넣는다.


그런데 이 모든 사고의 원인인 핫팩은, 사실 다정하다.


같이 걷던 지인이 손이 시리다며 연신 입김을 부는 모습에, 나는 슬쩍 주머니를 열어주었다.

“손 한번 넣어봐.”


상대가 내 주머니 속 열기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내 팔에 바짝 붙어 온다. 시린 손을 부여잡고 있던 지인의 얼굴이 이내 풀어지는 걸 보고 있으면, 카드와 립밤의 희생이 아주 헛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머니 속 작은 여름’이 이런 순간에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소지품 몇 개가 망가졌지만, 그 대신 붉게 얼어 있던 누군가의 손등이 제 색을 찾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겨울은 짐이 많아 번거롭지만, 이런 순간들 덕분에 생각만큼 차갑지만은 않다. 집에 돌아와 역할을 다한 핫팩을 쓰레기통에 툭 던진다. 카드는 여전히 살짝 휘어 있지만 결제는 잘 됐고, 립밤은 내일 아침이면 냉장고 안에서 다시 단단해질 것이다.



'주머니 하나 믿고 걷는 중'

photo by. 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