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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Oct 04. 2022

태초의 자연 속으로

#16  아도, 남아프리카공화국



9  태초의 아프리카




느릿한 달빛 아래, 깊게 잠든 이들의 고른 호흡만이 이 방의 고요를 지키던 밤이었다. 정확히 새벽 네 시가 되자 각기 다른 알람 소리가 겹쳐 울리기 시작했다. 단 하나여도 듣기 힘겨운 소리들이 쌓이니 그 자극은 배가 되었다. 어젯밤의 여파로 무겁기만 한 몸을 어렵게 일으킨 우리는 꼭 필요한 것들만 간단히 챙겨 서둘러 나왔다. 그래 봤자 카메라와 휴대폰, 그게 전부다.


숙소 문을 열자 마치 누구라도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바닷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날아갈 듯한 겉옷을 붙잡고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숙소 위에 위치한 언덕을 올라가니 양손 가득 음식이 담긴 봉투를 나르고 있는 Handre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의 아침인 듯했다.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오늘이 태초의 자연을 만나러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을 달려 멈춰 선 곳은 긴 통나무를 여러 개 세워 여기가 입구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리고 그 뒤로는 도무지 끝을 알 수가 없는 광활한 초원이었다. 이곳은 Addo Elephant 국립공원으로 남아공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Kruger에 비하면 규모는 조금 작지만 결코 적지 않은 동물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몇 분 뒤 경험하게 될 'Safari'는 스와힐리어로 '여행'이란 뜻인데, 사냥감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던 일을 뜻하기도 했다. 우리는 사파리 전용 투어카로 옮겨 타며 숨어있는 동물들을 찾아다닐 준비를 마쳤다. 매체에서나 보던 동물을 곧 마주할 생각에 설렘과 흥분의 감정이 차올랐다.






작은 공간에 동물들을 풀어놓고 일정한 시간에 끼니를 챙겨 주며 포식자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는 동물원과는 달리 아프리카의 초원은 생태계가 온전히 보전된 동물들의 터전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우리는 그저 자신들의 세상에 몰래 침입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가이드는 그들의 삶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작은 소리조차 내기를 유념하며 어스름한 새벽의 빛을 따라가던 찰나,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테랑이었던 가이드는 차 안을 감도는 긴장감 속에서도 침착하게 속도를 낮춰 사람의 걸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이윽고 어둠보다 더 짙은 무언가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것을 항해 조심스레 빛을 비추자 우리 앞에는 다름 아닌 어딘가를 향해 부단히 걸어가고 있는 코끼리 가족이 나타났다.





초원으로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얼룩말, 코뿔소, 사슴, 표범 그리고 이름조차   없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했다. 우리는  앞에 동물들이 있을 때면 모두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고, 느리게 움직이며 가능한 멀리서 지켜보았다. 거대한 버펄로 떼는 한참을 투어카 앞을 가로막으며 이동했고, 그들이  지나갔다고 생각했을 때는 화려한 무늬의 얼룩말 무리가 나타났다. 창문 너머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수컷 사자가 밀림의 왕답게 그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있는 라이온 킹을 직관한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꿈속에서도, 상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 웅덩이에 가득 모인 코끼리 무리들 중에는 태어난 지 고작 열 달쯤 되어 보이는 아기 코끼리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호기심 가득한 아기 코끼리는 엄마 코끼리를 따라 물을 마시더니 투어카가 신기해 보이는지 꽤 오랫동안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초원을 누비며 동물들의 삶에 빠져있을 무렵,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있는 하이에나 한 마리를 발견했다. 최상위 포식자인 사자도 공격할 정도로 사납기로 악명 높은 하이에나를 보면 보통 가까이 다가가지 않지만 가이드는 무언가 이상하다며 살펴보자고 했다. 다른 하이에나의 공격을 받기라도 한 건지, 자세히 보니 한쪽 귀가 찢어져 있었다. 다친 몸 때문에 사냥도 쉽지 않았을 터, 한동안 굶주린 듯한 이 작은 생명은 다가오는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다 이내 맥없이 몸을 뉘었다. 그토록 강하다는 하이에나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하염없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보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도움이 될지언정 인간의 간섭이 닿지 않는 것만이 이곳을 이토록 오래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였을 테니.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드넓은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그들의 작은 세상은 사실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은 인간이 건드리지 않는 한 시간이 흘러도 그 모습을 간직할 테지만 생명을 가진 우리는, 그리고 이곳의 동물들은 결국에는 사라지게 된다. 태초의 자연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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