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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Oct 30. 2022

저물지 않는 사파리의 하루

#17  제프리스 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10  저물지 않는 사파리의 하루



투어 기간 동안 우리의 하루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날의 준비된 일정을 마치고 새로운 숙소로 이동한 뒤 짐을 풀고 저녁을 먹었다. 마을마다 생김새는 조금씩 달랐지만 해안 도로를 달리는 여행이라 그런지 늘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묵을 수 있었다. 바다와 인접한 곳이라는 점 외에도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마을과 마을 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숙박이나 해양 스포츠 등 여행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식료품점, 세탁방과 같은 생활에 필요한 작은 상점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자연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사파리를 다녀온 날, 그러니까 열한 명의 친구들과 투어를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우리는 사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Jeffrey’s Bay'로 숙소로 옮겼다. 1840년대 남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오가던 제프리 선장이 이곳을 발견한 뒤 최초로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해마다 세계 서핑 대회가 열릴 정도로 힘 좋은 파도가 몰아치는 곳, 서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도시다. 각국에서 모인 에너지 넘치는 여행자들 덕분인지 활기찬 느낌이 가득했다.


숙소를 나와 마을의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만한 평안이 없었다. 테라스에 아무렇게 피어난 수풀 사이로 푸른 바다가 웅장히 드러났는데, 힘이 그렇게 좋다는 파도도 숙소에서 보면 잔잔한 물결이 아주 느리고 더디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위로는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 바다의 기운을 확장시키며 눈앞의 세상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고층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도시의 푸르고 창백한 조명이 아닌 따뜻하고 눈부신 햇살만이 고르게 마을에 내렸다. 수평선에서 반짝이던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나면 하늘은 주황색으로, 또 분홍색으로, 그리고 점점 진해지다가 이내 깊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도시를 여행할 때처럼 야경을 보러 간다거나 인기 있는 펍을 찾는다거나 하는 일들은 없었다. 우리는 테라스에서 오래도록 저녁을 먹었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때때로 오락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숙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포켓볼을 치거나 비어퐁을 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테라스에 있는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바비큐와 맥주를 먹고 있었다. 사파리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였을까, 식사가 끝나가는 데도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Handre, 오늘 투어는 정말 좋았어. 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이야. 근데 말이지, 우리는 이런 거대한 자연을 처음 접하는 거라 더욱 감동을 받은 것 같아. 하지만 Handre는 매번 같은 루트로 투어를 하잖아. 지겹지 않아?" Nino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에는 나도 가이드를 계속할 생각은 없었어.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잠시 돈을 벌기 위해 구했던 일이 가이드였을 뿐이지. 그런데 이 일이 점점 즐거워졌어.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니 같은 곳이라 해도 늘 다른 느낌이야. 그러다가 흔치 않게 너네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더욱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생각을 하던 Handre가 답했다. 장난기 넘치던 그가 예상치 못하게 진지하게 답변하는 모습에 집중하던 우리는 그의 마지막 말에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난 이 나라가 참 좋아. 다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봤지만 여기만큼 행복하게 지낸 곳은 없었어. 자연과 동물을 보는 일은 몇 번을 경험해도 질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난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할 것 같아." Handre가 덧붙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도, 그 일을 즐기며 계속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큰 행운인걸. 아프리카에 온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이 매력적이라는 것에 동의해." Nino가 Handre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얼마 전 아내와 이혼을 했어. 합의 하에 따로 살기로 결심했지. 그렇다고 서로 다른 사람이 생겼거나 사이가 안 좋아져서는 결코 아니야.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해왔어. 딸들은 성인이 되었고, 이제 우리도 남은 인생을 각자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보기로 한 거야. 그리고 나는 그 첫 시작으로 아프리카를 여행하기로 했지." Nino가 이어서 말했다. 백발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희끗함이 보이는 회색 머리칼에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주름, 처음 보았을 때 여행의 동기를 제일 알 수 없던 그였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속사정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선두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내 직업은 가수야. 시내에 있는 작은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어. 하지만 요즘은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어. 노래를 부르는 일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고 있어. 수입이 일정하지 않을 때도 있고. 그래서 실은 다른 일을 찾아보는 중이야. 근데 평생 노래만 해와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잘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오스트리아에서 온 쾌활한 사내아이 같았던 작은 Julia의 이야기였다. 마냥 즐거워 보였던 그녀도 그 이면에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기로에 놓여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라도 넌 잘할 것 같아. 에너지가 넘치고 긍정적이니까. 하지만 다른 일을 하게 되더라도 네가 좋아하는 노래 부르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지. 하지만 그 시기는 다를 수도 있어. 날 봐, 60살이 넘었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걸 찾아 너네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잖아. 조금 늦을 지라도 언젠가는 너의 순간이 올 거야, 틀림없이." Nino가 그녀의 말에 조심스럽게 응원을 보냈다. 진심이 담긴 온기 어린 마음이었다.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아프리카가 첫 여행이야. 한 번도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독일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태어나서부터 쭉 그 마을에 살았어. 그런데 39번째 생일날 문득 여행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이곳으로 오는 티켓을 샀어." 큰 Julia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때? 잘 왔다고 생각해?" Handre가 물었다


"물론이지. 어려운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여행을 꽤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있어. 체력적으로 조금 지칠 때도 있지만 전혀 내색 없는 Nino를 보니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다 너희 덕분이야." 큰 Julia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웃음을 보였다.


"나는 8개월 뒤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일할 예정이야. 잠깐 주어진 몇 달의 휴식 기간 동안 아프리카를 오게 됐지. 난 사람들에게 전화로 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어. 사람들과 대화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호의적인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라 쉽지가 않다는 걸 느껴. 나도 일을 즐기지는 못하고 있어. 얼마 전에 처음으로 서핑을 해봤는데, 그렇게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쾌감은 처음이었어. 남은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서핑을 하며 지내고 싶어."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나서 행동하는 Ramona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빛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짙은 어둠이 도시를 뒤덮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테이블의 양초는 어느새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국적은 물론 나이와 성별, 직업, 여행의 동기까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속사정. 일부분이지만 그들이 보여준 인생이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쉽게 꺼낼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꾸밈도 없이 솔직하게 말해서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나은 삶을 갈망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깨닫게 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Nino 할아버지


Handre


제프리스 베이에서의 저녁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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