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와일더네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도심을 떠나 다섯 시간 정도 달려왔을 쯤이었다. Handre가 차를 세우더니 갈아입을 옷과 수영복을 챙겨 내리라고 했다. 사실 여행 내내 그는 어디로 가는지 또는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의 걸음걸이와 믿음직한 말투, 확신에 찬 눈빛에서 그의 오랜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그를 신뢰하고 있었고, 가끔씩 던지는 그의 돌발 제안을 선물처럼 여기며 즐겼다. 짐을 잃어버렸던 나는 카메라만 챙겨 먼저 내렸고, 다른 사람들은 여벌의 옷을 챙긴 후 곧이어 내렸다.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는 좁고 길게 뻗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니 우거진 수풀 아래로 샛노란 카약 몇 대가 강가에 놓여 있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강가에 모여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그때였다. Handre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우리를 쳐다봤다.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뛰는 거야!
푸른 하늘 아래 잔잔하던 강물의 흐름과 고요하던 적막을 깨고 여기저기서 '풍덩'하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수차례 이어졌다. 그리고 온몸의 열을 순식간에 식혀줄 것만 같은 찰랑이는 물결 속에서 먼저 기쁨을 맛본 이들과 아직 뛰지 못한 나 사이에는 뜨겁고도 건조한 공기만이 거대한 벽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얼른 내려와!" 물속에서 재촉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젖으면 끝인걸. 못 뛰어."
"너 이걸 놓친다고? 진심이야? 후회할 텐데."
나를 향해 반짝이는 스물두 개의 눈동자들. 불과 몇 시간 전 만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의 행동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얼른 하나가 되고 싶었다. 뒷 일은 미래의 내가 감당하겠지. 지금의 나는 강하게 내리쬐는 이 태양을 피해 순간의 행복을 즐겨야겠다. 그렇게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차가움의 이불속으로 뛰어들었다.
뛰어들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포근한 차가움.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원하는 만큼 물장난을 쳤고 헤엄치며 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노란 카약을 내려 두 명씩 올라타고서는 저 반대편까지 누가 제일 빨리 도착하는지 시합을 했다. 힘차게 노를 젓고 있으면 살랑이는 바람이 응원을 속삭였고, 눈앞에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꾸밈없는 자연 속에 있어서 일까. 바람 부는 소리에도 깔깔 웃는 어린아이들이 된 것 마냥 즐거웠다.
열을 식힌 우리는 숙소로 향하는 차를 탔다. 첫 번째로 머물게 된 곳은 나이스나의 한적한 해변가에 홀로 위치한 호스텔이었는데, 연한 베이지색의 기다란 외관이 시골의 작은 학교 같기도 했다. 호스텔을 나와 낮은 언덕을 넘으면 바로 해변이 있었다.
짐을 챙겨 들어가 보니 주방에서 선셋을 연상케 하는 칵테일들이 준비되고 있었다. 긴 물놀이에 갈증이 난 터라 여기저기서 흥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칵테일을 하나씩 집어 들고 짐을 풀지도 않은 채 바닷가를 향해 달렸다. 끝없이 펼쳐진 넓디넓은 바닷가는 금세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매끈한 모래바닥은 순식간에 발자국으로 어지럽혀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뽐내던 아프리카의 태양이 어느덧 저물어가며 하늘색의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갔다.
모래 위에 앉아 석양을 닮은 칵테일을 마시며 오늘의 태양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행복, 나는 이 벅찬 감정을 느끼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는가. 사실 행복은 늘 곁에 있었다. 단지 이를 자각하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이스나의 하늘에 물든 주황빛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차오르는 감정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