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공화국
어제 처음 만났거나 아직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국적도 나이도 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방이었다. 깊게 잠든 이들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엷은 연두색으로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방으로 어스름한 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은 내 몸이 지구 반대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새벽의 어느 때에, 피곤한 눈길을 들어 올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니 창밖으로 산봉우리가 잘린 듯한 테이블 마운틴과 케이크에 흘러내리는 크림처럼 그 위를 포근하게 덮고 있는 구름의 형체가 보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구름의 움직임은 꿈속을 거닐 듯 참으로 신비한 광경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오늘 하려고 했던 하늘 위를 나는 스카이다이빙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어제 장난기 많은 호스텔 스텝 'Ivor'와 잃어버린 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 막바지쯤 그녀가 속사포처럼 읊어댔던 케이프타운의 수많은 할 거리들 중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Citybus. 여행지에서 빨간 버스는 수차례 봐 왔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오늘은 왠지 그 버스가 타고 싶어졌다. 어렵지 않게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몇 시간 뒤 탈 버스를 예매했다.
* Citysightseeing Bus
유명한 여행지에 도착해 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쨍한 빨간색의 2층 버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버스의 가장 큰 특징은 'Hop On & Hop Off'다. 'Hop'은 영어로 깡충 뛰어오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여행지가 나타나면 가볍게 내려 돌아보다 시간이 되면 다시 그 지점에서 타면 된다. 하루 동안 버스를 타고 내리며 한 도시가 자랑하는 관광 명소 중 원하는 곳들만 구경할 수 있다.
호스텔은 케이프타운에서도 부촌 동네에 있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바닷가와 접해있는 'V&A Waterfront'가 있었는데, 그곳이 오늘의 출발지였다. 케이프타운의 시티버스가 운행하는 노선 중 Ivor가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 극찬했던 'Hout bay'가 있는 블루 라인을 타 보기로 했다. 호스텔 스텝은 그 지역의 최고의 전문가이자 가이드니 그녀를 온전히 믿고 내 하루를 걸어보기로 한다.
특별함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던 빨간 버스에 대한 선입견은 버스에 앉는 순간 사라졌다. 버스에 놓인 이어폰을 꽂으면 실시간으로 지나고 있는 장소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귓가에 가득 울려 퍼지는 가이드의 흥겨운 목소리, 이따금씩 느껴지는 버스의 덜컹거림, 한껏 설레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 넓고 깨끗한 유리창을 프레임 삼아 시시각각 변하는, 단 한순간도 놓치기 싫었던 도시의 풍경까지. 낯선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곳만을 누비는 빨간 버스를 타는 동안 온몸으로 이 도시를 느끼고 있었다.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정류장을 서너 차례 지나 보내고 한 장소에 내렸다. 사방이 온통 초록색으로 가득 찬 이곳은 1685년 만들어진,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와이너리가 있는 'Constania Nek'이었다. 산골짜기, 산길이란 뜻의 'nek'은 남아공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이 나라의 거대한 크기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산골짜기에 내려 '퍼플 라인'으로 갈아타야 와이너리로 갈 수 있었다.
드넓은 포도밭 사이로 무수히 많은 발걸음들이 만들어 놓은, 잘 다듬어진 산책로가 있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곳을 거닐기만 하는 것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런 땅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면 마셔보지 않아도 그 맛이 대단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와이너리 투어를 신청하면 다섯 잔의 와인을 시음할 수 있었는데 포도밭을 바라보며 마시는 아침의 와인은 향긋하면서 달콤했고 또 산뜻함이 입안을 감돌았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한 병 샀을 텐데, 담아갈 캐리어도 없는 상황이라 맛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한 바퀴 둘러본 뒤 다음 버스를 타러 내려가는 중이었다. 어느새 맑게 갠 하늘 아래 우뚝 솟은, 와이너리의 역사만큼이나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 아래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늘막을 따라 시선을 옮겨가다 보니 수평선을 따라 곧게 뻗은, 와이너리를 감싸는 하얀 벽에 기대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아까 산책로를 거닐 때부터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내 앞을 걸어가던 노부부였다. 그 고요하고 안온한 순간을 오래 남기고 싶은 마음에 사진기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향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어요. 허락 없이 찍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너무나도 다정하셔서 이 사진을 드리고 싶어요." 조심스럽게 다가가 사진을 보여 드렸다.
"하하, 아까 우리 뒤에 있었던 너구나. 어디 보자."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지 안경을 추켜올리며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할아버지였다. "이렇게 우리를 네 사진기 속에 담아줘서 고마워." 할아버지는 사진과 나를 번갈아보며 덧붙여 말씀하셨다. 혹여나 허락 없이 사진을 찍었다고 싫어하시거나 부담스러워하시진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우린 케이프타운에 살아. 주말이면 종종 아내와 이곳을 오고는 해.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지. 너는 여행으로 온 거니? 혼자서?" 말을 하는 중간중간 아내를 쳐다보며 미소 짓는 할아버지에게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네! 어제 도착해서 오늘이 이틀 째 되는 날이에요. 무척 설레요."
"벌써 이곳을 오다니, 여행 코스를 아주 잘 선택했구나. 혼자 여행 왔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을 담아줄 사람도 없겠는 걸. 사진기를 줘봐. 내가 찍어줄게." 대답할 새도 없이 내 손에 있는 사진기를 받아 든 할아버지는 안경을 아예 머리 위로 올리시고는 본인이 서 있던 자리를 내어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셨다.
"항상 조심해야 해. 즐거운 여행 되렴. 그리고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순간과 혼자서만 간직하고 말았을 마음이었다.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사진을 찍은 적은 간혹 있었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어 전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좋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날의 용기는 아침의 와인 덕분인지, 여행이 주는 힘으로부터 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이 됐든 남아프리카의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그보다 더 따뜻한 마음과 값진 사진을 받았다.
버스 시간의 간격은 정해져 있어서 같은 장소에 내리면 코스가 겹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World of Birds'라는 새들의 세상에서 형형색색 아름다운 동물들을 구경하고, Ivor가 말했던 'Hout bay'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었다. 보통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혼자 왔어?" 식당 쪽으로 걸어가는데 같은 버스에서 내린 한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짧은 금발에 동그란 얼굴, 선하면서도 귀여운 미소를 지녔다.
"응, 너는?"
"난 엄마랑 여행 중이야. 점심 먹으러 가는 거면 같이 먹을래?" 그녀의 뒤로 정말 똑 닮은, 그녀의 얼굴에서 20년쯤의 세월만 흐른 듯한 그녀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지!" 그녀가 먼저 건넨 제안이 고마워 곧바로 승낙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맑게 반짝이는 에메랄드색 해안가를 따라 식당들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건물에 있는 생선 요리를 파는 식당에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2층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 모녀는 바다에서는 당연히 그들의 나라 대표 음식인 'Fish and chips'를 먹어야 한다며, 우스갯소리로 본인들이 그 맛을 평가해 주겠다고 했다. 그들을 따라 별다른 고민 없이 가장 기본 메뉴로 시켰다.
"난 Jessica라고 해. Jess라고 불러줘. 엄마랑 나는 영국의 Alderny라는 작은 섬에서 왔어. 아마 잘 모를 거야."
모녀의 가족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Alderny'라는 작은 섬에서 농업(farming)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늘 이 모녀와의 점심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는 곳이었다. 본인이 살고 있는 동네와 가족과 함께 키우는 동물들을 보여주는 그녀에게서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아프리카는 엄마와 함께 하는 첫 여행이라며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쏟아냈다.
"Life's one big journey of adventure. Just say yes more!" 그녀와의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었다. 함께하는 시간 내내 그녀의 눈은 긍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반짝였다. 이윽고 요리가 나오자 모녀는 비장한 자세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나에게 보라는 시늉을 하며 몇 입 맛보더니, '영국에 비해서는 덜하지만 꽤나 맛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얗고 통통한, 갓 튀긴 생선의 맛은 실로 대단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 나누며 점심을 먹던 중, 바닷가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실로폰처럼 생긴 타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전통 악기인 '마림바'였는데, 통통 튀는 경쾌한 음이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와 어우러져 맑고 꾸밈없는 이 장소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연주가 시작되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더니 어느새 모두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리의 사람들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사람들도 모두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If you happy and you know it
clap your hands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우리는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했고,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