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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Jul 17. 2022

제 짐이 분실되었다고요...?

#12  요하네스버그, 남아프리카 공화국



3  MISSION INCOMPLETE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들어서자마자 더운 기운이 몸을 감싸는 걸 보니, 명실상부하게 아프리카에 도착했음이 느껴졌다. 최종 목적지인 케이프타운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1시간 30분이 남아 있었다.


승무원이 당부했다시피 이번 공항에서 짐을 찾은 뒤 다시 부쳐야 했다. 수하물이 나오고 있는 트랙의 가장 앞단을 뚫어져라 지켜보며 작은 샴페인색 캐리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마지막 탑승객이었으니 가장 나중에 짐이 실렸을 텐데, 생각보다 짐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꽉 찼던 트랙에 있던 짐들이 하나둘 주인을 찾아가고, 북적거리던 사람들의 움직임도 고요해질 무렵이었다.


"왜 우리 짐이 안 나오지?" 어딘가에서 익숙한 언어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귓가에 들린 모국어에 자연히 고개를 돌렸더니 뒤편에 다정하게 붙어있는 한국인 남녀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우리들 사이에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 오갔는데 이 상황에 대한 반가움과 착잡함이 섞인 듯했다. 자연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짐이 되게 안 나오네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한국에서 출발하셨어요?" 여자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인천에서 홍콩을 환승해서요. 비행기가 지연되어서 겨우 탔지 뭐예요."

"저희도요. 아무래도 저희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항공사 데스크로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같이 가보실래요?" 그녀는 뒤편의 인포데스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항공사 데스크로 가는 동안에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결혼한 지 꽤 되었다는 이 부부는 요하네스버그에 살고 있다며, 오랜만에 잠깐 가족들을 만나러 한국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항공사 데스크는 입국장을 나가기 전 짐 찾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사람 한 명만이 겨우 업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우리가 다가오자 짙은 네이비색 유니폼을 입은 붉은 뿔테 안경을 쓴 통통한 여자가 쳐다보고는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 직원은 우리가 타고 온 항공편과 여권 번호를 검색해 보더니, 경유 시간이 짧은 탓에 우리 짐이 옮겨지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짐을 찾으면 다음 항공편을 통해 묵고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며 관리 장부로 보이는 작은 수첩을 건네며 주소를 적으라고 했다. 직원은 빠르면 이틀, 늦으면 사나흘이 걸릴 거라고 덧붙였다. 부부가 먼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본인들의 주소를 쓴 뒤 내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었다.



"혹시 숙소 주소가 저장이 안 되어 있나요? 저희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핫스팟을 켜 드릴 수 있어요." 주저하는 내 모습을 보던 부부가 말했다.


"아... 저는 이틀 뒤에 묵을 숙소를 몰라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저는 곧 비행기를 타고 케이프타운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이틀 정도 머물다가 남쪽 해안을 따라 여행할 예정이거든요. 아직 숙소를 정하지 않은 데다가 매일 이동해야 해서요. 주소를 어떻게 적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순간의 정적을 깨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케이프타운으로는 언제 짐이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틀 뒤부터는 케이프타운을 떠나 하루하루 숙소가 옮겨질 예정이라 짐을 받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마지막 날 묵으려고 했던 케이프타운 숙소 주소를 적어냈다. 조금 일찍 도착하겠지만 숙소에 양해를 구하고 보관할 참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부부는 숙소도 채 다 예약하지 않고 온 내가 걱정된다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엇이 잘못되면 연락하라면서 본인들의 이름과 현지 번호를 종이에 적어 줬다. 076으로 시작하는 열 자리의 숫자를 누를 일은 다행히도 없었지만 나는 그 작은 종이를 여행 내내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부부와 작별인사를 하고 시간을 보니 다음 비행기까지 겨우 50분이 남아있었다. 짧기만 한 환승시간이었지만 짐을 다시 부칠 일이 없으니 그리 촉박하지는 않았다. 요하네스버그 오알탐보 공항의 입국장에 들어서자 방금 전 부부와 함께 있었던 그 공간과는 완연히 다른 생경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분잡했는데, 마치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들 같았다. 나를 향해 다가오던 그들은 환승 게이트를 향해 곧장 걸어가는 나를 보고서는 이내 발길을 돌려 다른 표적을 찾으러 떠났다.


앞으로 열흘간은 짐 없이 여행해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작은 캐리어에 열심히 챙겼던 짐들을 떠올리면 허탈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챙길 것이 없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긴장한 마음이 살짝 풀리며 홀가분하기도 했다.




4   케이프타운의 흥부자, Percy 



2시간 뒤 도착한 케이프타운은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이었다. 공항에서 나가기 전 심카드를 사고, 숙소까지 향하는 우버 택시를 불렀다. 얼마 뒤 Percy라는 이름이 화면에 떴고, 곧 택시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마치 이곳에 음악이 깔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리듬감이 느껴졌다.



"안녕, 짐은 어디에 있어?" 퍼시가 내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나 짐이 없어, 이게 다야. 그냥 가면 돼." 작은 가방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정말? 너 어디서 왔는데? 여행 온 거 아냐?" 안 그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의아하다는 듯 그가 되물었다.



숙소는 해안가 근처라 공항으로부터 꽤 거리가 있어 40분 정도 걸렸다. 차에 타기 전부터 호기심이 가득한 그에게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나보다 훨씬 흥분해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내 나이를 물어보고서는 살짝 놀라며 이내 자기 나이를 맞혀보라고 했는데, 그의 외모만 보고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놀랍게도 그는 겨우 21살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한국을 가보고 싶었어. 돈을 벌면 꼭 한국에 갈 거야."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며 숙소에 다와 갈 때쯤이었다. 백미러를 통해 나를 쳐다보며 퍼시가 말했다.


"한국? 왜 한국으로 오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약간 놀라 답했다.


"몇 달 전에 내 친구가 한국으로 갔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사람들도 친절하고 음식도 맛있다고 하더라고. 아시아를 꼭 가보고 싶었는데, 만약 가게 된다면 한국을 제일 먼저 갈 거야." 미리 준비라도 해놓은 듯 퍼시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어떤 나라에 가겠다는 이유로는 단순했지만, 그래서 더 와닿았다. 나도 여행지를 결정할 때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가보고 싶어서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흥과 에너지가 넘쳤던 퍼시와의 대화는 따뜻하고도 즐거웠다. 덕분에 짐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잊혀 갔다. 비록 여벌의 옷도, 세면도구도, 캐리어에 담긴 그 어떤 것도 수중에 없었지만 대신에 잃어버릴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도착했으니, 난 생각한다. 미션은 아직 미완성일 뿐, 시작은 성공했다고.





숙소로 가는 길. 베스트 드라이버, Per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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