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탠저린 Jul 10. 2022

이름 좀 예쁘다고 혹하지 마요

#10  태양의 섬, 볼리비아



1  태양이 태어난 곳으로 가는 길



영화나 책에서도 제목이 중요하듯 은유적인 표현이나 익숙하지 않은 소리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여행지의 이름은 그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기다 이름에 담긴 의미까지 있다면 더 흥미롭다. '태양의 섬'은 그 두 가지를 다 충족하는 장소였다.

4,000m가 훌쩍 넘는 섬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면 보이는 드넓고 잔잔한 호수의 절경,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구름, 그리고 오직 이 섬만을 비추는 듯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까지. 태양의 섬은 그 어느 곳보다 하늘과 긴밀한 장소였다. 그렇기에 잉카인들은 태양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고 믿었고 섬을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다.



태양의 섬에 관한 이야기는 여행 중에 알게 되었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이곳은 섬을 횡단하는 트레킹 코스로 유명해 특히 서양 배낭 여행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곳이라 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 신비한 곳을 가기 위해 마추픽추 트레킹과 쿠스코 일정을 무리해서 하루 일찍 끝냈다. 몸이 몹시도 고단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무사히 출입국심사를 마치고 볼리비아 땅을 밟았지만, 코파카바나로 이동할 생각을 하니 고민이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배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에 다섯 명을 태워줄 수 있는 차량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평화롭고 생기 넘쳤던 페루의 국경 마을과는 달리 볼리비아 쪽은 인적 없이 돌덩이만 가득해 허적했고 활기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나라라고는 하지만 문 하나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다니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일단 마을 쪽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인터넷은 당연히 될 리가 만무했지만 GPS는 잘 잡혔다. 이럴 때면 아득하게만 생각했던 인공위성들의 존재에 대해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내딛는 걸음에 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며 우리들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 무렵, 희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들과 사람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차가 보이는 대로 코파카바나를 갈 수 있을지 물어봤다. 치안이 안 좋기로 악명 높은 볼리비아에서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어떻게든 안전한 방법을 찾으려 했겠지만, 다섯 명이 함께라면 해볼 만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투력이 충만했다. 그리고 몇 번의 흥정 시도 끝에 마침내 코파카바나로 간다는 차량을 구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한적한 시골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졌지만 전혀 설레지 않았다. 태양을 만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고되다니. 여행은 겪어보는 거라며 이름에 홀려 무턱대고 계획을 틀어버린 탓일까? 유럽에서도 기껏해야 여섯 시간 정도 버스를 타 본 게 전부였던 터라 적어도 반나절에서 하루를 써야 이동할 수 있는 남미 대륙을 너무 쉽게 봤던 탓이다.


코파카바나에 도착해서 우리는 곧장 태양의 섬으로 가는 표를 예매하기 위해 항구로 갔다. 갖은 이유로 시간을 허비한 탓에 아침 표는 날려버렸고, 오전 표도 만석이었다. 가장 빨랐던 한 시 반 표를 예매하고, 남은 시간 동안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튀긴 요리와 산더미처럼 쌓은 감자, 밥이 대부분인 페루와 볼리비아.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는데, 며칠을 먹어대니 오늘은 그마저도 질려버려 음식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가방을 정리하는데 압력 차로 빵빵하게 부푼 커피 봉지를 보니 4,000m 가까이 되는 이 고도가 실감이 났다.



코파카바나 선착장으로 가는 길
선착장 앞의 풍경





2  퓨마의 밤하늘에 지도를 그리다



운송로로 이용할 수 있는 곳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 퓨마라는 뜻을 가진 '티티'와 바위를 뜻하는 '카카'가 합해져 생긴 이름이다. 태양의 섬을 포함해 41개의 섬이 있으며 아직도 케추아족을 비롯한 많은 원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다.



호수가 얼마나 큰 지 배를 타고 한 시간 반은 들어가야 섬에 당도할 수 있었다. 배를 탄 사람들과 이야기를 잠깐 나눠보니, 각자 출발한 곳은 달랐지만 대부분이 코파카바나까지 오는 데 여덟 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배의 홀 가운데 앞뒤로 멘 배낭들을 모아 놓고 그 주변으로 둘러앉았다. 멀리서 볼 때는 잔잔하기만 했던 호수였지만 건너는 동안 배가 자꾸만 흔들려 속이 울렁거렸다. 배가 정착해서 내릴 때까지 모두가 말이 없었다. 그저 파도가 배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태양의 섬으로 향하는 배 안
태양의 섬, 북섬의 선착장




오후 세시 , 쿠스코를 떠난  열여덟 시간 에 섬에 도착했다. 섬을 횡단하겠다는 당찬 결심은 사라진  오래였다. 우리는  돌아보지 않고 처음 보이는 숙소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방값은 겨우 30 (한화 5000)이었는데, 난방은커녕 온수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섬에 대해 들었던 말 중 달랐던 것은 없었다. 양과 라마, 소들이 느릿하게 섬을 돌아다녔고, 호수는 맑고 깨끗했으며, 하늘은 그 어디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문제는 쿠스코에서 큰 무리 없이 지나갔던 고산병이 이제야 밀려왔던 것이다. 섬을 잠깐 돌아보다 저녁 먹으러 가겠다는 친구들을 보내고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자고 싶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몸안의 감각은 너무나도 또렷했고 고통이 온전하게 느껴졌다. 가져왔던 고산병 약이 생각나 꺼내 먹었다. 몇 분 지나자 잠깐 고통이 가시는 듯했다.


그러나 새벽 한 시, 머리가 깨지는 느낌에 일어나 보니 친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구역질이 났다. 약을 챙겨 먹고 바깥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왔다. 날은 쌀쌀했고 바람은 차가웠으며, 하늘에선 별이 유난히도 반짝였다. 이 순간을 마냥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여행 중에 처음으로 집으로 가고 싶던 순간이었다.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섬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밤하늘을 도화지 삼아 지도를 그려보는 것.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 다시 대도시로, 그곳에서도 또 두어 번의 환승을 거쳐야 할 것이다. 이틀 뒤에나 한국에 도착하겠지. 미련조차 가질 수 없는 거리였다. 맨눈으로 밤을 새우고 첫 배를 타고 섬을 떠나기로 했다.



소들이 한가로이 쉬는 섬의 풍경
일몰 시간, 무언가를 짓고 있는 섬의 주민




3  그날의 용기



돌아가는 작은 배에는 우리와 한 가족만이 탔다. 섬을 떠날 때에서야 그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홀에만 앉아 있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섬의 곡선을 따라 층층이 자리 잡은 건물들의 풍경은 마치 이탈리아 남부 포지타노에 있는 듯했고, 드문드문 솟은 나무들은 불필요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곳만의 매력을 듬뿍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감히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수평선을 따라 호수가 끝없이 펼쳐졌다. 하늘과 호수가 만나 하나의 푸르름을 만드는 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나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배의 선체에 누워 생각했다. 못 견디게 괴로워했던 지난밤은 이 거대한 세상에서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저 작은 나뭇잎 같은 것이 아닐까.




아무리 오래 겪었던 일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왜곡되거나 흐릿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태양의 섬에서 보냈던 이 날만큼은 유독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제는 이렇게 무모한 일정으로 여행하지도, 이름에 홀려 무작정 떠나지도 않지만 아주 가끔은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나버릴 수 있었던 이 날의 그 용기가 그립다.



포지타노가 떠오르는 남섬의 건물들
티티카카 호수의 한 가운데 솟은 한 그루의 나무


이전 09화 국경 앞에 열린 우리들의 작은 휴게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