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푸에르토 나탈레스, 칠레
의류 브랜드의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Patagonia'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는 남미 대륙의 최남단 지역을 일컫는 용어이기도 하다. '마지막 희망'이란 거룩한 뜻을 가진 칠레 남쪽에 위치한 'Ultima Esperanza'라는 주(state)에는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가 속해 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경이로운 자연이 마지막 희망이 된 이곳은 칠레의 자랑이자 산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1~2주 정도 토레스 델파이네 트레킹을 계획하는데, 트레킹을 떠나기 전 식량과 장비를 최종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마을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머무른다.
터미널로부터 쭉 뻗은 연회색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렴풋이 보이는 짙은 에메랄드색의 바다, 그 너머로 첩첩이 쌓인 완만한 능선의 푸른 산맥. 시야를 방해하는 고층 건물이나 웅장한 유적지 하나 없이 작고 낮은 집들만이 무지갯빛 구슬을 뿌린 듯 자유롭게 흩어져 있는 아담한 바닷가 마을. 칠레의 최남단,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두툼한 남미 가이드북에 있는 수많은 숙소를 훑어보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동화책에서 나오는 착한 마법사들이 살 것 같은 집과 'Patagonia Adventure'라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름. 만약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게 된다면 꼭 이곳에 묵겠노라 결심했었다.
호스텔은 마을 입구로부터 걸어서 3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서두를 필요도 없었지만, 마을을 향해 걸음을 내딛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그림 같은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십 번도 넘게 봤던 작은 사진 속의 그 하늘색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무로 된 두꺼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하늘색의 외관과는 상반되는 붉은 세계가 펼쳐졌다. 윤기 나는 원목 가구들 위로 베틀 직조로 유명한 마푸체족 원주민들이 만든 알록달록한 직물들이 군데군데 올려져 있었고, 한쪽의 빨간색 벽에는 각 나라의 국기와 지도가, 다른 쪽의 주황색 벽에는 토레스 델 파이네를 상징하는 그림과 사진들이 삐뚤빼뚤 붙어 있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가지 물건들이 한데 모여 있는데 어수선하지 않고 이상하리만치 아늑했다. 꼭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에 나오는 아이리스의 시골집을 크레파스로 색칠한 것 같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던 나무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니 빨갛고 노란 색색의 폭신한 이불이 놓인 침대에 누군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나를 올려다보고는 예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 영국에서 온 'Natalie'는 두 달간 혼자 여행 중이라고 했다. 짙은 밤색 긴 생머리에 푸른 눈동자, 살짝 올라간 눈썹에서 풍기는 도시적인 분위기가 영드 <Skins>의 '카야 스코델라리오'를 연상케 한다.
"짐이 별로 없어 보인다. 남미로 여행 온 지 얼마나 됐어?" 짐을 풀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말을 건넸다.
"3주쯤 지났어. 페루에서 시작해서 볼리비아, 칠레 북부를 여행하고 어젯밤에 산티아고를 떠나 방금 도착했지." 쌀쌀한 기운에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가장 두꺼운 후드티를 찾아 꺼내 입으며 답했다.
"어젯밤에 출발했다고?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 거야?" 흥미가 생긴 듯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녀가 되묻는다.
"버스를 타면 40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해서 비행기를 탔는데도 꼬박 반나절이나 걸렸어. 넌 여행한 지 얼마나 된 거야?"
"하하, 역시 남미야. 이 대륙이 굉장히 크다는 걸 이동할 때마다 느껴. 난 한 달쯤 됐는데 너랑 루트가 반대인 것 같아. 난 쿠바,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거쳐서 여기로 왔거든. 이제 네가 말해준 나라들만 남았어! 칠레는 어땠어?"
"음... 칠레 북부는 정말 낭만적이야. 특히 밤에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보다 행복할 수가 없었어. 깔라마는 위험해서 조심해야 해."
"그리고?"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산티아고는 모든 걸 다 갖춘 도시였는데, 특히 언덕이랑 공원에서 보는 풍경이 예술이야. 일요일에는 환전소가 문을 다 닫으니 미리 환전해야 해. 난 고생을 꽤나 했거든."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 지난 여행을 되짚어보는 동안 조금씩 기억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난 남미에 오기 전부터 아르헨티나를 가장 기대했어. 아르헨티나는 어때? 탱고도 배워봤어?"
"물론이지. 엄청난 일이 있었어. 아르헨티나는 말이야..."
여행 기간이 비슷했지만 동선은 정반대였던 그녀와 주고받았던 대화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탈리가 이야기해 주는 아르헨티나 속에 내가 상상했던 모습을 그려보며 기대감이 더욱 증폭됐다.
어렸을 적 친한 친구와 함께 썼던 교환 일기장을 바꿔 든 순간, 호기심에 가득 차 단숨에 서로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던 그 들뜨고 설렜던 감정이 다시 느껴졌다. 누군가의 여행기는 어디에나 있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서 들을 수 있는 그녀만의 여행기는 어느 곳에도 없을 테니까.
그때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었다. 나탈리는 오후 세 시쯤이면 고향에 있는 남자친구와 영상통화로 서로의 하루를 나눈다고 했다. 우연히 옆에 있다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보기도 했지만 시공간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애틋하고도 달콤한 그들의 사랑 공세에 기꺼이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운 사람의 연락에 기뻐함과 동시에 혼자 떠나버린 미안한 감정이 섞인 여자, 그리고 낯선 곳을 여행 중인 연인을 걱정하는 마음뿐인 남자. 같은 지구 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남자가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을 때 여자는 흐린 달빛 속에 있었다. 24시간 중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그 1시간 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들의 간절한 사랑이 더없이 순수하고도 아름다웠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빛에 잠에서 깨어나 후드티를 걸쳐 입고 숙소를 나섰다. 3분 거리에 바로 항구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따뜻한 햇빛이 온몸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수증기의 밀도가 꽤 높은 듯 그림자까지 드리운 구름은 넓디넓은 하늘을 반이나 채웠고, 그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바다와 만나 반짝거렸다. 어느새 달려온 마을 아이들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뛰어놀기도 했다. 이 마을에 있으면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트에서 산 신선한 식재료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흔들리는 잎사귀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가만히 누워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낮이면 구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올려다봤고, 밤이 되면 별들이 얼마나 빛을 내는지 바라봤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행복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들은 그런 내게 '항상 행복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고스란히 두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