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쿠스코, 페루
잉카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옛 수도 쿠스코. 마추픽추로 가는 여행자들이 필수로 거쳐가는 도시다. 거쳐가는 곳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도시의 낮과 밤이 아름답다. 쿠스코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에 자리 잡은 대성당과 수녀원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지만, 지금은 쿠스코에 남아 있는 잉카 전통 양식과 어우러져 도시의 특징이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저물어갈 무렵, 리마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쿠스코에 도착했다. 해발 3,600m에 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숨쉬기가 답답했다. 도시를 둘러볼 새도 없이 오늘 묵을 괜찮은 숙소를 찾기 위해 가파른 돌계단을 올랐다. 고산지대에 있으니 겨우 11kg의 짐 무게도 배로 느껴져 계단 하나를 오르기도 힘겨웠다. 한편으로는 이 높은 고도에서 돌을 날라 집을 짓고 골목의 벽을 다지며 도시를 만들었던 옛 잉카인들의 모습이 그려지며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언덕에 도달하니 호스텔이 몇 군데 보이기 시작했다. 숙소를 한 두 군데 둘러보다 우리는 마음을 결정했다. 건물 외관에서 풍기는 깨끗하고 안전한 느낌과 주인아주머니의 친절하고 푸짐한 인상, 딱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하필 남은 방이 2층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서 더 올라가야 하다니, 고도를 단 1m라도 높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쿵-하고 뛰면 부서질듯한 나무 계단을 여덟 번 올라 다락방 같은 곳에 짐을 놓았다. 지붕 모양을 따라 굴곡진 새하얀 천장과 그와 이어진 돌벽, 균일하지 않은 바둑판무늬의 붉은 바닥. 그 공간 사이로 난 조그만 창 밖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의 풍경까지 참 근사했다. 이 도시를 그대로 담은 듯한 오각형의 방이 꽤 마음에 들었다.
감탄도 잠시, 짐을 풀다 어지러운 느낌에 잠시 침대에 누웠더니 위아래로 움직이며 빙글빙글 회전하는 놀이기구를 탄 것 마냥 몸이 붕 뜬 것 같이 몽롱했다. 어릴 적 자주 봤던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스페인어에 능통했던 친구 한 명은 여행을 다니며 틈이 생길 때마다 내게 단어 몇 개와 필요한 문장들을 알려 주었다. '꾸', '따', '뽀'와 같은 음절이 많아 리듬감도 있고 배우자마자 바로 써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즐겁게 언어를 배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숙소를 나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 골목 곳곳에 열린 형형색색의 상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알록달록한 가방과 신발, 마추픽추와 라마가 그려진 상징적인 티셔츠,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알파카의 털로 만들었다는 판초도 있다. 한 가게에 들어가 친구들과 구경을 하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의 아들이라는 요정같이 생긴 꼬마가 와서는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
¿Cómo te llamas?
이름이 뭐야?
그 모습이 귀여워 말을 걸자 꼬마는 쑥스러운 듯 대답 없이 요리조리 눈을 피한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않고 꼼지락꼼지락 자꾸 내 주변을 맴돌았다. 호기심 많은 동그란 눈을 가진 이 꼬마 요정은 친구들이 물건을 고르는 동안 혼자 사진을 찍고 있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디선가 파란 페도라와 옷을 걸치고 와서는 내 옆에 찰싹 붙었다. 그리고는 핸드폰 작은 화면 속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을 가리키더니 금세 멋진 표정을 짓는다.
이 꼬마, 이 가게의 영업비밀인가 보다.
너무 귀여워서 나갈 수가 없잖아.
결국 우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쇼핑 봉투 하나씩을 쥐고 나왔다. 나는 마추픽추가 새겨진 티셔츠를 4천 원쯤 되는 가격에 구매했는데, 아프리카와 미얀마에서도 주야장천 잘 입고 다녔으니 열 배는 족히 넘는 가치를 발한 듯하다.
쇼핑을 마친 우리는 가게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식당에서 꾸이를 먹어보기로 했다. 여행 오기 전 다큐멘터리를 보며 한번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있으니 그 비주얼에 마음이 실로 약해졌다. 음식은 순간적인 즐거움이라 오감으로 즐겨야 하는데, 이럴 때만큼은 좋은 시력과 청력, 예민한 후각과 미각이 원망스럽다. 쿠스코의 현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가게에서 맛본 꾸이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음식과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액티비티를 도전해 보는 일은 지루한 일상에 신선한 자극이 되니 한 번쯤은 경험해 볼만 하다.
꾸이(cuy)는 쥐목에 속하는 동물로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전, 즉 돼지나 소, 닭과 같은 가축이 아직 페루에 유입되지 않았을 때 옛 잉카인들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가격이 비싼 편에 속해 특별한 날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대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도시에 어둠이 깔리자 거리 곳곳을 밝히는 노란 가로등이 켜지고 언덕 너머에 위치한 집들의 불빛은 밤하늘에 수놓은 별처럼 빛났다. 매 초마다 움직이는 빛의 황홀함에 젖어 들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르마스 광장의 매끈한 바닥은 도시의 빛을 반사시키며 반짝였고,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의 다양한 언어가 섞인 흥겨운 대화 소리가 도시에 울려 퍼졌다.
물감이 번지듯 자연스레 여행자들과 마을 사람이 어울리는 이 특유의 분위기를 즐기며 우리는 광장 바닥에 푹 눌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고 가는 여행자들과 한 두 마디씩 주고받기도 하고, 춤추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빙빙 돌며 이 순간을 남기기도 하면서. 그렇게 쿠스코의 밤을 보낸다.
이 도시에 도착한 지 다섯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사랑에 빠져 버렸다.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쿠스코, 꾸스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