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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Jul 07. 2022

국경 앞에 열린 우리들의 작은 휴게소

#09  카사니, 페루



1  그래야만 하는 루트



아름다운 순간으로 가득 차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기대를 너무 많이 했었거나, 예기치 못했던 사고를 겪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매력적인 여행지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친해지기에는 참 어려웠던 곳,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Copacabana) 그리고 태양의 섬(Isla del Sol)이다.



처음으로 '야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날이었다. 그것도 그토록 아름답다는 '태양의 섬'으로 말이다. 이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페루에서 볼리비아 '코파카바나'로 이동한 뒤, 배가 다닐 수 있는 곳 중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도에 있다는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가야 했다. 새로운 도시를 만나는 순간은 늘 설렘으로 가득하지만, 사랑에 빠졌던 도시를 떠나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아쉽기만 하다. 추억이 깃든 쿠스코 광장의 마지막 순간을 오롯이 눈에 담으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볼리비아까지 함께 여행하기로 한 숙소 친구들과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표를 사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홀 양옆으로 스무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버스업체의 티켓 부스들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었다. 저마다 상단에 올려놓은 작은 네모난 판에는 수많은 목적지들이 강렬한 색들로 빼곡히 적혀있다. 마치 '우리 업체는 이렇게나 많은 곳들을 갈 수 있답니다!'라고 소리 내어 앞다투는 듯해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휘황찬란한 간판들의 범람 속 홀로 빛을 내는,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이름만을 내 걸은 단출한 파란색 간판. 이곳이 바로 우리가 찾던 그곳, 여행자들 사이에서 입소문 난 '크루즈 델 수르(Cruz Del Sur)'다.



"코파카바나행 세 장이요."  우리 차례가 되자 설레는 마음으로 티켓을 요청했다.


"우린 코파카바나 직행이 없고 푸노나 라파스로 가는 것만 있어요. 바로 가는 걸 타고 싶으면 맞은편에 보이는 저 부스로 가보세요."


뒤돌아 직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작게 느껴지는 노란 간판의 부스가 보인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던 우리는 잠깐의 고민 끝에 새로운 업체의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코파카바나 직행을 운행하는 곳이 새로 생기다니,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꽤 인기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좌석 등받이가 1등석처럼 쭉 넘어간다는 '까마(Cama)' 석을 예약하고 얇은 종이로 된 티켓을 받아 들었다.



수기로 써 주는 티켓,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이기 때문에 여권번호는 필수다. 가격은 90 솔 (한화 약 3만 원)



정보가 별로 없는 여행지에서는 누군가의 후기가 안전을 보장했고, 그것은 곧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많은 후기를 몰고 오며 사람들에게 '그래야만 하는 루트'로 그 당위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아마도 우리가 그 첫 후기의 주인공이 되는 날인가 보다.





2  여기서 내리는 것 맞나요... 어디죠?




페루의 버스 터미널 풍경
버스 1층의 까마 좌석



여행자보다 현지인이 더 많은 승차장. 그들이 지니고 있는 가방의 크기를 보아하니 목적지가 어딘지는 몰라도 가까운 곳은 아닐 듯했다. 세계 축구팀들의 유니폼이 떠오르는 특색 있는 버스들 사이로 노란색과 파란색이 섞인 버스를 찾아 탔다. 버스는 층에 따라 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1층은 우등버스의 좌석 같은 까마였고, 2층은 일반 좌석이 있는 세미 까마석이었다.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세미 까마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 같다는 후기와는 달리 자리에 앉으니 원인 모를 축축하고 습한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떤 불편함도 밀려오는 졸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잠시 깬 순간조차도 꿈인가 착각할 정도로 잠에 취했을 무렵, 친구가 나를 깨웠다. 일어나 보니 버스는 멈춘 상태였고, 창밖으로 허허벌판만이 보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터미널이나 휴게소 같은 건물은커녕, 나무 한 그루도 없는 벌판에 말이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붙잡고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니, 지금 다른 차량으로 갈아타야 한다며 얼른 내리라고 했다. 눈앞에 있는 건 사람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턱없이 작아 보이는 두 대의 밴. 이미 자리는 꽉 차 있었다.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진 몰라도 우린 이 밴에 못타. 다음 걸 타자.'



"다음 밴은 언제 와요? 자리가 꽉 찼잖아요." 기사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게 다예요. 저기 빈 곳으로 들어가요. 빨리 타요." 그는 짐이 놓인 바닥과 허공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핸드폰도 안 터지는 이 벌판, 비몽사몽 한 상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든 코파카바나에만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짐을 끌어안고 밴의 바닥에 몸을 구겨 넣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집어넣다니, 이 나라는 교통경찰도 없나 보다.


구겨앉은 그 자세조차 적응되니 아무렇지 않았다. 새우잠에 빠져 한 시간쯤 흘렀을까. 갑자기 멈춰 선 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코파카바나에 가는 사람들은 지금 내려야 한단다. 그건 현지인 사이에 끼어있던 외국인, 우리 셋이었다.



"여기는 코파카바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기 문 같이 생긴 것 보여요? 페루랑 볼리비아의 국경이에요. 저기로 나가요."

"그럼 국경을 나가서 코파카바나는 어떻게 가나요?"

"뭐... 차를 잡으면 될 거예요. 걸어가면 두 시간이면 가요."



분명 코파카바나행 티켓을 샀는데 차를 잡거나 걸어가라니 이게 무슨 대책 없는 소리인지. 티켓에 적힌 목적지를 보여줘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국경 가까이도 아닌, 겨우 그 형태만 보이는 곳에 내려놓고 떠나버렸다.




2층 버스에서 밴으로 갈아탔던 순간, 바닥에서 바라본 시선





3  국경 앞에 열린 우리들의 작은 휴게소



우리는 국경을 앞에 두고 버려졌다. 정말 '버려졌다'라는 표현이 맞았다. 이후 다른 버스를 타고 코파카바나에 도착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국경에서 잠시 승객들을 내려준 버스는 국경을 통과해 출입국심사를 마친 승객들을 다시 태우고 목적지에 데려다줬더랬다. 심지어 우리보다 20솔이나 저렴한 가격에 표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의 요동치는 마음과 달리 잔잔한 마을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했다. 푸른 호수를 둘러싼 이 작은 마을에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마을 주민들은 느릿느릿 일을 하고 있었다. 여러 나라의 국경을 거쳐 봤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서두를 필요 없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우리는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전봇대를 받치고 있는 블록을 테이블 삼아 쿠스코 시장에서 사 온 과일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뒤따라오던  번째 밴이 멈춰 섰고 우리와 같은 처지로 보이는  명의 여행자가 내렸다. 기사와 옥신각신하던 그들은 이내 체념했는지 돌아서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브라질에서 온 Melissa 멕시코에서 온 Vania, 그녀들은  말도  되는 상황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우리가 펼쳐 놓은 과일들을 보며 어이없다는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자기들도 먹을게  있다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꺼냈다.


그렇게 우리는 페루와 볼리비아가 함께 보이는, 흔치 않은 이 국경을 배경 삼아 작은 휴게소를 만들었다. 미술 시간에 하늘을 그리라고 하면 항상 그렸던 그림이 눈앞에 있었다. 우리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국경 옆 아름다운 마을 '카사니'


'Tuna'라고 하는 선인장 열매, 단맛은 전혀 없다. 그리고 웃음이 예뻤던 멜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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