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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freeze 그림책 Aug 08. 2022

이방인의 그림책_숲의 요괴

나를 찾지 마세요!


이름 없는 배달부 아저씨는 이름 없는 산을 매일 넘어갑니다. 트럭을 몰고 가는 아저씨에게 산은 그저 지나쳐가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아저씨에게 중요한 건 실수 없이 물건을 잘 배달해주는 일이니까요. 차 안에 갇혀 눈에 띄지 않고, 차 안에서만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아저씨의 일상이 조금은 외로워 보입니다.


어느 날 습관처럼 오고 가던 산길에서 뜻밖의 일이 생겨납니다. 화장실이 급했던 아저씨는 볼일을 보러 차에서 내려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아저씨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길을 찾아 헤맬수록 아저씨의 모습이 조금씩 기이하게 변해가기 시작하죠. 사람의 형체를 벗어난 기괴한 요괴의 모습으로요.  마침내 주황색 털이 빼곡히 자라난 거대해진 몸으로 숲 속을 거침없이 뛰노는 그의 표정은 해맑고 자유로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던 귀여운 친구가 함께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기대와 다짐으로 시작했던 올해는 벌써 반 이상 지나가버렸고,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세상의 구석에서 작은 존재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갑니다. 늘 같은 길을 오가며 익숙한 풍경을 지나치고 낯설고 외로운 사람들을 스쳐갑니다. 어제의 불안과 상처는 그대로입니다. 그저 큰 기대 없이 견디고 버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계를 극복하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더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갑니다.


종일 비가 옵니다. 한참을 격렬하게 쏟아지다가 곧 그칠 것 같더니 다시 거센 비바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뉴스에서는 비로 인한 피해 소식이 이어집니다. 지루한 일상에 비가 더해져 지친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모두가 이 사나운 비로부터 무사하길.


하루를 기다림으로 시작했습니다. 배송일을 잘못 선택한 줄도 모르고 온라인으로 장을   오지 않아 초조했던 오전이었어요. 뒤늦게 실수를 확인하고선 신랑의 도시락을 싸야 했기에 어쩔  없이 천둥소리와 비바람을 뚫고 마트를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방학중인 아이들의 밥을 차리고 치우고, 수시로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견뎠습니다. 둘째의 계속되는 요구사항을 조율하고 핸드폰 사용을 통제하면서 널브러진 옷과 물건들의 무의미한 정리를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상황을 감당하기 위해서 현재에 무심하려 애써보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혼자 결정할  없는 중요한 문제들이 앞에 놓여 있거든요.




그림책 '숲의 요괴'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나에게 낯설고 신비로운 세상을 상상해보게 만듭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이상해져도 괜찮습니다. 실컷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꼭 내가 사람일 필요도 없고요. 그저 내가 좋을 대로 존재하면 그만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힘겨울 때, 일상의 내가 지루할 때, 다른 내가 되고픈 자유가 간절할 때 이 그림책을 떠올립니다. 배달부 아저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근사한 요괴가 되어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 같거든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을 찾은 것임을 깨달으면서요. 잠시만요, 나를 찾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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