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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컨리 Jun 03. 2020

샤이니 "종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났는가?

디지털 유산

어릴 적 "죽음"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한 적이 있다. 죽는 게 무서웠다. 아마 대중매체의 힘이 컸다고 본다.

공포물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해하던가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전설의 고향, 드라큘라, 강시 등을 시청한 날엔 혼자 잘 수 없었다. 죽으면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문득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잊히겠지?', '영혼이 존재해 다른 세계에 사는 건가?', '아무것도 남지 않나?', '죽을 때 고통은 있을까?'등의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밤만 되면 불안했다. '죽음'관해 생각하다 지쳐 잠이 들곤 했다. 몇 날 며칠을 그랬던 것 같다. '죽음'에 대해 진지했다. 어느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기 보단 잊혔다. 언제 잊혔는지 정확이 기억 안 난다.




과거 인류 역사를 보면 죽음은 오늘날보다 일찍 찾아왔다. 삶은 끔찍하고 험악했고 짧았다. 우리나라는 1940년 전까지 평균 수명이 마흔이 안됐다.


< 구글 검색 >


하지만 평균값에 대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평균의 종말' 책에서 평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높은 값과 낮은 값에 대한 수치를 평균 낸 것이기 때문이다.

1940년 이전 사람들은 배고픔, 질병, 전쟁 등을 통해 일찍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평균 수명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균 나이보다 더 오래 산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산업 혁명을 통해 생활수준의 향상,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류의 수명이 높아졌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세기 중반부터 인구 수도 같이 늘어났다. 인구수가 늘어나 죽는 사람도 많아졌다. 과거 마을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인구 증가로 인해 공동묘지는 산으로 옮겨졌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죽은 사람의 공간을 산 사람의 공간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의 안식처 옆을 지나갈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다. 고인을 방문하기 위해 특별히 일정을 잡아야만 한다. 


< pixabay.com >


나는 살면서 3명의 가족을 떠나보냈다. 외사촌 동생, 외할머니, 친할아버지를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세 사람을 보기 위해선 교외로 나가야 한다. 모두 산에 매장되었다.

동생은 십수 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갓 20살이 되던 해였다. 엄청 울었다. 죽음은 정말 슬픈 것이다. 그때 외삼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그땐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옆에 있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동생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가슴속 기억과 납골당에 가거나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외할머니는 내가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돌아가셨다. 돌아오자마자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버스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돌아가실 때 나를 걱정하셨다고 한다. 한 번씩 어머니와 외할머니 이야기를 하면 둘 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니는 아직도 못 해 드린 것에 대해 슬퍼하신다. 어머니는 타지로 시집와 맏며느리가 되셨다. 농사일이 빠쁘고 외갓집을 자주 갈 수 없었다. 1년에 2번 정도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더 어머니가 안쓰럽다.

친할아버지 임종을 옆에서 지켜봤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통을 겪으신 게 눈으로 느껴졌다.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주사를 맞으셨지만 몸은 그렇지 못했다. 잔뜩 움츠러져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한 슬픔은 생각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그 기억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긴 한가보다. 어느 순간부터 세 사람이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슬픔 감정을 느끼니 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디지털 유산을 남긴다.


우리는 지난 2백 년의 기간을(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측면 모두에서) 삶으로부터 죽음이 분리되는 길고 점진적인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사태가 반전되었다. 지난 몇십 년 사이 우리 자신이 산 자와 죽은 자가 재회하는 모임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06년은 우리가 산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공간에 죽은 사람이 계속 머물게 할 수 있는 기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해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 폰이 보급되면서 현재 모든 일을 폰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소셜 네트워크의 대중화로 인해 일상적인 말과 이미지들을 포착해 온라인상에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온라인상에 남긴 디지털 정보를 관리한 것에 대해 명시적 (내용이나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또는 그런 것) 이거나 미묘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 정보를 소홀히 다루면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디지털 시대에 시민들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은둔자, 실용주의자, 큐레이터, 상시 접속자, 생활 기록자"로 분류된다.


은둔자: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한다. 부모님, 이전 세대들이 이에 속한다. 인터넷상에 최소한의 흔적만 남긴다.

디지털 실용주의자: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만큼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 SNS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다.
 
큐레이터: 실용주의자가 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해 SNS 활용해 넓은 범위의 대중들과 소통한다.

상시 접속자: 인터넷을 외부 두뇌 장치처럼 사용하면서 문제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멀티태스커(여러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이다.

생활 기록자: 자기 일상을 최대한 기록하고 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한다.

<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


나는 은둔자를 시작했고 변화를 거치면서 생활 기록자에 속하게 되었다. 글을 통해 의도적으로 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만약 큐레이터, 상시 접속자, 생활 기록자에 분류된다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신체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인터넷상에 남긴 가상 자아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끌면서 활동한다. 살아 있는 동안 온라인에서 더 많이 참여할수록, 죽은 뒤 '디지털 자산, 자서전, 기록 보관소, 전기, 개인 정보'가 남는다.


<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


죽기 전 유서를 작성하는 사람은 절반이 안된다. 디지털 발자국에 대한 관리와 처분을 미리 생각해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고 본다. 외사촌 동생, 외할머니, 친할아버지는 디지털 은둔자였기 때문에 디지털 발자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앞으로 나는 살면서 많은 디지털 유산을 남기게 될 것이다. 매일 스마트 폰과 인터넷을 사용하고, SNS에 글을 게시하면서 유산을 채워가고 있다. 이제 죽은 사람도 교외 공동묘지에서 돌아와 공동체 속으로 다시금 섞여 들기 시작한다. 온라인 어디서든 존재하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 "애도(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와 슬픔"이 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까? 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샤이니 그룹의 리더였던 종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팬들 가슴속에는 그가 존재하고 있다. 디지털 애도 방식으로 종현을 다시 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해 줬다.


https://restofworld.org/2020/kpop-jonghyun-twitter-korean/


사람은 언젠간 죽게 된다. 죽음에 있어 평등하다. 죽음이란 존재는 그 자체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틀렸다. "디지털 유산"을 통해 남아 있는 사람은 나를 기억하게 된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은 이상 기억될 것이다.



< 디지털 시대의 사후 세계 > 일레인 카스켓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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