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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Oct 24. 2023

들깨 벨 수 있는 사위가 딸보다 낫구나

가을이 되었다. 초록빛으로 싱그럽게 뜨거운 열기를 감싸던 여름이 갔다. 트렌치코트 한 번 입었을 뿐인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빠의 전화와 카톡의 사진을 보니 가을이 잠시 스쳐간 것 같다.



논 위로 누런 자태를 뽐내던 서있던 벼들이 기계가 지나가면서 우수수수 베어져 떨어져 나간다. 노랗게 익은 벼가 늘어서 있을 때 여겨지던 풍성한 마음을 보다 마른논 위로 잔디인형들이 줄줄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구나 싶다.


벼를 추수하고 난 후에도 시골의 가을은 바쁘다. 체감하는 온도는 패딩을 입어야 할 만큼 추운 올해의 가을이지만 쉴 새 없이 손과 발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시골에서 느껴지는 가을의 분위기를 보노라니 개미가 겨울을 위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알 것 같다. 틈틈이 따 놓은 녹두들과 마당에 늘여 놓은 팥들을 보고 있으니 저것들로 겨울에 녹두 삼계탕을 해 먹고 호호 뜨거운 팥죽을 먹는 상상을 한다.




지난 주말에는 남편에게 일이 있었다. 고사리 손이지만 시골의 일을 도울 수 있을까 싶어 친정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딸들과 버스를 타고 간다고 연락을 드렸다. "아빠, 들깨 베러 갈게". 주말에 내려간다고 이야기한다니 아빠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사위는 일이 있어서 못 내려갈 수도 있다고 전하자 대뜸 아빠가 하시는 말씀에 마음에 파란 물이 들었다.


"사위가 없으면 어떡해, 사위가 와야지"


보통의 남자보다 일에 능숙한 사위는 친정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장 때에도 그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배추를 뽑고 저리는 것부터 씻고 나르는 일 등 혼자서 여러 사람의 몫을 하는 사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늘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고 쳐도 딸이온 다고 하는데 아빠의 답변에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일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보고 싶은 쪽의 시소가 더 바닥으로 기울어 있었다. 못내 발을 디뎌 '나는 일을 도우러 가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엉덩이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보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말씀이 맞았다. 딸 둘을 데리고 가면 논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아빠가 터미널로 태우러 나와야 하는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애들을 보느라 일을 썩 잘 도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통화를 마치고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딸이 간다고 하는데 사위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너무하지 않냐며... 사위가 뭐 일하기 위해서 장가 온 건가... 투덜거리기도 했다. 남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일단 생각을 좀 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채비를 마친 남편이 어서 처갓댁에 가자며 나를 보챘다.


친정에 도착하자 둘째 이모가 와서 알타리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셋째 이모가 김장과 들깨를 베기 위해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친정에서 첫째였기에 아빠의 위상은 대단했다. 키와 덩치가 본인보다 크지만 한 번의 부름으로 동서들을 모을 수 있었다. 들깨를 꽤 심은 아빠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에 동서와 사위까지 논으로 불렀다.



언제 가도 논은 참 좋았다. 파란 하늘까지 함께하니 일이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높은 하늘만큼 마음이 구름 되어 두둥실 떠다녔다. 혼자서 감정에 취해 들깨 사진을 찍으며 흠뻑 취해 있을 때 아빠는 사위에게 낫질하는 법을 가르쳤다. 들깨 밑 부분을 뭉텅이로 붙잡고 낫의 가운데 부분으로 내리쳐서 한 번에 베어내면 되는 것이다. 초반에 버벅거리던 남편은 꽤 일을 능숙하게 해 나갔다.


뭐 어려울 것 있겠어? 아빠의 설명대로 나도 난생처음 낫질을 해봤다. 응? 분명 아빠가 할 때는 한 번에 쓱 하고 베어지던 들깨들이 백 년 된 나무를 도끼로 찍는 것처럼 꼼작하지 않았다. 몇 번 낫질을 하다 돌부리에 낫이 부딪치기라도 하면 칼날이 내 가슴을 찌를까 무서워 낫질을 하던 손을 멈추게 했다.


결국 나는 들깨를 손으로 부러뜨렸다. 풍년처럼 잘 자란 들깨는 줄기가 꽤나 두꺼웠다. 낫으로 베기 위해 기울이는 일을 조금 더 하면 톡 하고 부러지기도 했다. 차라리 나에게는 이 방법이 안전하고 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낫질을 한 번씩 해봤는데 어떨 때는 기분 좋게 한 번에 들깨의 목이 댕강 잘리면서도 어떤 때는 잘리기 싫어 붙잡고 있는 들깨의 줄기 때문에 낫 끝으로 톡톡 두드려 끊어내기도 했다.


"아직 이것밖에 안 한 거야?"


나름 열심히 땀 흘리며 들깨를 베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나보다 3배가량의 들깨를 베고 왔다. 절로 박수가 나왔다.


'이래서 아빠가 사위~사위~하는구나'


잘하는 남편은 빠른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 칼로 내리 치듯이 들깨를 치면 한 번에 벨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그게 안되는 거니까 답답한 거지. 결국 나는 나대로의 방법으로 들깨를 베어 나갔다.


논의 한쪽 면을 정리하고 다른 쪽으로 이동하면서 남편에게 푸념을 했다. "이렇게 들깨를 많이 심을 필요가 있을까?". 혼자서 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일들을 해서 결국 사위와 동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아빠가 힘든 것도 걱정이었거니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말을 했다. 남편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같이 투덜대면서 농사일이 싫다고 한 마디 거들 줄 알았는데. 남편은 자신이 농사를 지은다면 장인어른처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봐야 오전 한 나절에 슬슬 하면 될 일이라고. 이번은 주말이었으니까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니까 수월하고 좋지 않냐고.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 부부는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 어릴 적 생떼를 부리던 딸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들깨를 모두 베고 난 후 뒤늦게 온 이모부와 남편은 들깨를 지지하기 위해 박아 둔 쇠꼬챙이를 뺐다. 주변에 들깨를 묶어둔 끈들까지 수거하고 나니 들깨를 베는 작업이 모두 끝났다. 작년에는 들깨를 늦게 베어서 터는 작업까지 함께 어두워 질 때까지 작업을 이어갔지만, 올해는 조금 일찍 들깨를 벤 탓에 일이 빨리 마무리 되었다. 이제 들깨를 말려서 털기만 하면 될 일이다.


차마 사위에게 말하지 못한 건지, 도리깨질은 못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빠는 동서에게 다음 주에도 놀러 오라고 했다. 말은 놀러 오라고 했지만 도리깨 질로 들깨들을 힘껏 두들겨 줄 것을 부탁하는 아빠였다. 옆에서 듣던 남편은 나에게 다음 주에도 처갓댁에 오자고 했다. "아니, 왜? 주말에 일 있다고 하고 쉬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우리가 안 오면 저걸 장인어른 혼자 어떻게 다 해".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남편이 던진 말 한마디에는 처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끌어안고 일단 생각해 보자고 마무리 지었다. 아직 들깨가 다 마르지 않아 일주일 뒤에 들깨를 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한 상이 벌어졌다. 예전부터 대식구 손님 접대를 잘하던 엄마는 큰 솥단지에 닭 다섯 마리와 묵은지를 넣은 닭볶음탕을 했다. 밖에서 알타리를 담그며 일을 마무리 짓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솥 안에서 묵은지와 닭이 익어갔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고 한 수저 떠 넣은 맛은 놀라웠다. 아무런 간도 하지 않았는데 닭뼈에서 우러나온 국물의 진한 맛과 묵은지의 궁합이 꽤 괜찮았다. 여기에 참치액젓을 넣으면 완성이었다. 액젓을 들고 넣으려는 나를 남편이 만류했다. "장모님이 하시는 게 낫지 않겠어?". 장모님 손 맛이 좋은 것을 알아주는 남편의 행동 하나에게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 오래 삶아 씹을 것도 없이 부드럽게 익은 묵은지와 갓 담근 무청에 부드러운 닭고기의 삼합은 밥 세 공기를 부를만큼 맛있었다.


이모부들과 술자리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코로나가 있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인해 간만에 둘째, 셋째 이모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반가웠다. 유일하게 술을 마시는 처제들을 향해 "같이 짠을 해야지~어째 처제들은 술을 못해~"라고 말하며 사위와 함께 잔을 기울였다.


어릴 때는 주말마다 자주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모부들, 고모부들 할 것 없이 좁은 거실을 꽉 채우는 머리수만큼 웃음소리도 떠나지 않던 유년시절이 다시금 재현되었다. 그 옆자리에 남편이 있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결혼 10년이 되고 장인 장모님 외에 남편이 이모 식구들과도 편하게 웃으며 술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있다는 게 오묘한 기쁨을 선사했다.


 "이게 얼마만이야,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 동서들과 사위에게 아빠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제 우리 김장 때 보자고". 밭에 심은 배추와 무를 뽑아 200 포기의 김장을 담가야 하는 올해의 큰 노동이자 일 년 치 저장식품을 위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의 가장 큰 겨울준비가 곧 시작된다. 그때도 가족간의 단란한 정으로 추위를 이기며 동네가 떠나가는 웃음을 양념삼아 김치를 담궜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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