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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Nov 01. 2023

한밤에 담그는 알타리 김치

김치를 담그러 갈 생각은 없었다. 본래의 목적은 들깨를 베기 위해 친정에 가는 것이었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주차를 위해 백미러를 보던 남편이 "누가 있는데?"라고 말했다. 분명 들깨를 베기 위해 셋째 이모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 식구가 먼저 왔기에 의문을 가지고 뒤를 봤다. 마당 한편에 둘째 이모와 엄마가 알타리를 다듬고 있었다. '들깨를 베는 일정 말고 무슨 일이 더 있었나 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알타리 김치는 김장 전에 둘째 이모와 엄마가 담가왔다. 작년까지 알맞게 익은 김치 한 통을 가볍게 받아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손수 알타리 김치를 담그게 됐다.


알타리는 아빠가 밭에서 미리 뽑아 놓은 터였다. 이모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 다듬고 있을 때 도착했으니 한자리 차지하고 같이 일을 하면 좋겠지만, 나는 남편과 논으로 가야 했다. 들깨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으나 해가 떠 있을 때 일을 마무리하는 게 좋기에 급한 불부터 끄러 논에 갔다.


사위가 열심히 들깨를 벤 덕분에 논에서 일이 빠르게 끝났다. 그렇다 해도 시간은 다섯 시를 가리켜 시골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집에 가보니 마당에 큰 고무통 두 개가 뚜껑을 덮은 채로 있었다. 깨끗하게 다듬은 알타리가 굵은소금에 절여지고 있는 중인가 보다.


은근히 추운 날이었다. 초록 은행잎이 채 노랗게 물들지도 않았는데 가을이 보쌈이라도 당한 것처럼 겨울이 온 것 같았다. 김치 담그는 일에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엄마와 이모들이 밖에서 일을 하는데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엄마 발에 꼭 맞는 고무장화를 꾸역꾸역 신고 두 팔을 걷어 밖으로 나섰다.


쪽파를 정렬해서 하나하나 씻었다. 갓과 저려둔 알타리까지 여러 번 헹구기를 반복하니 버무릴 준비가 얼추 된 것 같았다. 김장에 필요한 재료를 찾기 위해 들어간 거실에서는 이모부와 남편이 마늘 꼭지를 따고 있었다. 에서 힘들었을 테니 마당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조신하게 마늘을 다듬고 있는 게 참하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밖에서 큰 일 치르고 온 가장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런 느낌일까.


마늘을 믹서기에 갈고 나니 알타리 김치를 담그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 대형 비닐을 깔고 고춧가루를 부었다. 액젓과 간 마늘, 쪽파, 갓, 새우젓, 매실액 등을 넣고 버무려 양념을 만든다. 색이 분명 빨갛게 고운 것 같은데, 어두운 시골에서 야외 벽등 하나에 의지해 김치 양념을 만들자니 알 길이 없었다.


"색이 곱네, 맛있겠다 맛있겠어"


엄마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마법의 주문을 걸었다. 이건 분명 맛있을 거라고. 백내장 수술이 초능력을 발휘하기라도 하는 듯 보이지도 않는데 색이 이쁘고 좋다고 하신다. 어둠 속에 두 눈이 가려져 입 속 감각은 더 민감해졌다. 빨간 고무장갑에 양념을 툭 찍어 맛을 보니 소금이 더 필요했다. 한 차례 두 차례 굵은소금을 넣었다. 알타리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더 짜도 된다며 유명 셰프가 소금을 뿌리듯 엄마는 양념에 짠 기운을 더했다.



본격적으로 알타리를 넣고 버무리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씻어 놓은 알타리를 넣으면 양념의 양을 조절해서 할 수 없기에 조금씩 양념과 알타리를 넣고 버무렸다. 평상 네 곳을 세 꼭짓점으로 나눠 엄마와 이모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알타리를 버무렸다.


"잘한다 잘해~잘하는구먼!"


엄마가 셋째 이모에게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일이 능숙하지 않은 셋째 이모가 김장을 함께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이 바빠서 큰언니가 챙겨주는 김치를 받아서 먹기만 했었는데, 올해는 달랐다. 언니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보며 스스럼없이 양념과 알타리를 휘저으며 버무렸다. 엄마의 칭찬에 "이것도 해보니까 재밌네~" 웃으며 여유 있게 대답하는 이모가 어색해 보였지만 보기 좋았다.


둘째들은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한다는 편견이 있다면 옳은 말 일 것이다. 우리 둘째 이모는 일을 참 잘한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휙휙 일하는 이모의 기준에서 어찌할지 모르는 셋째 이모와의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모들과 있으면 좋지만 때때로 분쟁 속에 내가 놓이게 되면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이번 김장에서 이모들은 잘 버무려진 김치처럼 함께 어울려 일을 해나갔다.


둘째 이모가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면 셋째 이모가 '틱'하고 받아쳐야 했는데 '어? 그렇구나, 이렇게?'라고 말하는 셋째 이모의 부드러운 대응이 낯설었다. 이런 일이 반복돼서 인 건지 둘째 이모도 더 이상 가시를 세우고 말하지 않았다. 빨간 양념에 하얀 알타리의 무가 묻어나 반질반질 윤이 난다. 무청도 빨간 양념 옷을 입고 버무려지듯 이모들도 그간의 일들은 소금에 절여져 누그러트리고 김치를 버무린다. 김치가 익어 알타리의 쓴맛이 빠지고 시원한 감칠맛을 내듯 이모들 사이도 이제 익어갈 일 만 남은듯하다.


엄마와 이모들이 각자 김치통에 알타리를 넣는다. 동생들 김치통을 우선해서 넣다 보니 총각무는 없고 무청만 남았다. "언니, 내 거에서 총각무 빼자" 셋째 이모가 나서서 말한다. "내 거도 좀 빼, 난 무청을 더 좋아해" 둘째 이모도 지지 않고 얘기한다. 나눠 먹을 때 받는 사람의 양이 제일 많다더니 엄마의 김치통에 총각무가 수북하다.


뒷마무리는 이모들에게 맡겼다. 손이 시리기도 했지만 밥 먹을 준비가 급했다. 의외로 이모들은 옥신각신하지 않고 척척 마무리를 진행했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진짜가 남았다. 재료비를 나눠야 하는 계산을 해야 한다. 그동안의 김장을 보면 엄마와 둘째 이모가 재료비를 나누고 동생들에게 김치를 나눠줘 왔다. 재료비에 포함되지 않은 아빠의 알타리와 저녁 식대비를 생각하면 엄마가 손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거 다 따지면 어떻게 살아, 이렇게 다 같이 해서 먹는 게 재미인거지"라고 부모님은 말하셨다.


올해는 세 자매가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더니 계산을 마쳤나 보다. "언니 확인해 봐 지금 돈 부쳤어" 셋째 이모가 말했다. "오케이~확인했어" 엄마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들이 없을 때 엄마와 단둘이 얘기했다.


 "엄마, 이번 김장 분위기 좋은데?"


"그러게 말이다. 둘이 싸우지도 않고 계산까지 척척하고 나야 좋지~~"


밤에 담그는 알타리 김치는 성공적이었다. 잘 보이지 않아서 지나치고 묻어갈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 일일이 보고 따지지 않고 무던하게 넘어가는 인정이 있어야지. 그러다 보니 김장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훈훈했다.


보이지 않는 밤이라서 촉각이 민감한 덕분에 올해 알타리 김치 맛은 먹어 본 것 중에 으뜸이다. 시댁의 김장김치를 주로 먹는 남편이 가위로 쑹덩쑹덩 썰어 내놓은 총각무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슨 소리가 경쾌하다. 라면에 잘 익은 총각무를 한 입 베어 물으면 맛에 반하고 이모들과 한밤에 마당에서 김치를 담그던 그날이 떠오른다. 잘 익어 시원한 맛을 내는 알타리처럼 우리의 오늘도 무르익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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