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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Apr 25. 2024

주방 후드에서 떨어지는 것은

친정 부모님이 오랜만에 놀러 오신 날이었다. 갑자기 주방에서 딸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밀가루 어디 있니?"

"아빠, 밀가루는 왜요?"

"일단 줘 봐"


어릴 적 아빠의 재떨이 심부름마저도 잘했던 나는 바로 밀가루를 찾아 앞에 놓았다. 주방에는 잘 오시지 않는 아빠가 가스레인지 앞에 서시더니 두 팔을 뻗어 후드 필터를 분리하셨다. '저게 분리가 되는 거였어?'세상을 처음 본 아이처럼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봤다.


8년도 지난 예전 일이라 기억이 분명하진 않지만 밀가루를 이용해 후드 필터를 청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밀가루가 기름을 제거한다고 했는데, 필터 사이에 낀 밀가루를 없애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던 것 같다. 어쨌든 아빠 덕분에 누랬던 후드 필터가 본연의 은빛을 드러냈다. 새것처럼 바뀐 주방 후드가 마음에 들어 연중행사로 아빠가 오실 때마다 장난스레 필터 청소를 부탁했지만 밀가루를 이용한 방법이 맞지 않으셨는지 다시는 딸 집 주방 근처에 오지 않으셨다.




며느리 집에 오셔서 편히 쉬시면 좋을 테지만 시어머니는 소화를 핑계 삼아 항상 설거지를 하셨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살림에 더 소홀해진 나는 어머니가 스쳐 지나간 자리가 좋았다. 똑같이 행주질을 해도 어머니가 한번 쓱 닦고 나면 싱크대 상판이 거울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장인의 손끝으로 싱크대 구석구석을 닦던 어느 날, 어머니가 키친타월로 종이접기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네모로 반듯하게 접은 것을 가스레인지 뒤편에 놓으셨다.


밥상을 다 치우고 주방에 가서 어머니에게 연유를 물으니 얼굴이 벌게질만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드에서 방울방울 맺힌 기름들이 몸집을 키워 중력의 힘을 받고 싱크대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시어머니는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주방 후드를 떼서 닦아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며느리로서 후드 청소까지 어머니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조만간 스스로 하겠노라 다짐하며 어머니를 소파에 모셨다.



참 이상했다. 청소로는 회복되지 않는 후드의 실태를 파악하고 3년 전 남편이 새 후드로 교체를 해주었다. 아무리 관리가 소홀했다고 해도 후드를 교체하기 전에는 기름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는데...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필터에 떼가 너무 껴서 기름이 떨어질 구멍조차 없었던 걸까. 이건 너무 최악이잖아?


아이들이 크면서 고기를 자주 구워 먹어서 그럴까?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생각하면서도 몸은 후드 근처에 지 못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생생하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프로그램에서 후드 청소의 심각성을 보셨나 보다. 모든 일에 아내보다 빠른 조치가 가능한 남편에게 '후드 관리'라는 미션을 내려주셨다.


남편과 난연 소재의 필터를 사는 것에 고민했으나 결국 사지 않았다. 후드에 한 겹 씌어 놓고 지내는 건 싫었다. 시누는 필터 대신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준다고 했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낫다고 생각되어 장바구니에 담겨있던 종이 필터를 잊은 채 지냈다. 시간은 흘렀고 후드 내 노란 방울이 고였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가스레인지 쪽으로 떨어지지 않으니 음식을 먹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것도 미루는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살림에 관해 수요일 연제를 하는 날이 되었다. 답답해하던 살림 중 하나를 가지고 글을 써야 했다. 나의 살림에 많은 구멍이 있지만, 이번 주제는 '주방 후드'로 결정다.


그러나 해결책없었다. 주방 후드에 손 하나 대지 않은 상태에서 글 한 자도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이 출근한 7시, 살림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주방 후드 청소를 시작했다.


검색 창에 주방 후드를 치니 손 소독제를 이용하면 기름때가 깨끗하게 지워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일어나기 30분 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했다. 필터 두 개를 꺼내고 후드 창을 열어 눈에 보이는 기름 떼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닦고 보니 후드 필터 문제가 아니었다. 후드 필터를 지나 환풍기 내부에 미세 기름 입자들이 후드 창 틈새로 고여 싱크대로 떨어졌다.


필터를 제거하고 후드 위아래로 구석구석 닦아냈다. 하얀 키친타월이 캐러멜로 적셔진 것처럼 기름때를 벗겨낸 덕분에 본래의 하얀 주방 후드를 만날 수 있었다.



얼추 작업이 마쳐졌을 때 아이들이 일어났다. 불과 30분 밖에 안 되는 시간에 3년 동안 미뤄두었던 일을 해결했다. 이게 뭐라고 미뤄두었을까?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걱정만 하고 손이 나가지 못했는데, 막상 마음먹으니 가볍게 할 수 있는 손쉬운 일이었다.


살림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했던 약속도 잊고 또 미룬 채로 지나갔겠지?


주방 후드 필터가 온전히 기름을 막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난연 소재의 필터 또한 사용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자랑해야겠다.


"어머니 저 주방 후드 청소 했어요. 잘했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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