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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May 01. 2024

청소기를 끌어안고 지하철을 타다

잘 돌아가던 청소기가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은 6개월 전이었을 것이다. 청소기 롤이 돌아가면서 미세 먼지들을 흡입해야 하는데 롤이 돌아가지 않았다. 반면 청소기의 모터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제 할 일에 충실했다. 청소를 하는 데 롤이 돌아가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힘을 주어 밀면 수동으로 롤이 밀렸기에 눈에 보이는 먼지들이 없어지기는 했다. 가끔 한 번 밀었을 때 먼지들이 딸려 들어오지 않으면 청소기를 들어 올려 그 부분에 강한 바람으로 흡수하여 끌어당기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래도 딸려 오지 않으면 청소기 헤드 부분으로 쾅쾅 두드리면서 반동에 의해 먼지를 청소기 통 안으로 인도하기를 수차례, 이제는 문제를 직시하고자 청소기 헤드를 살펴봤다.


문제는 극명했다. 긴 머리 여자 3명이 사는 집이라 얽히고 뭉쳐진 머리카락들로 인해 롤이 돌아가는 틈을 모두 막았다. 손으로 뺄 수도 없이 끼어 있는 머리카락을 긁어내고 물티슈로 청소까지 하고 나니 이제 롤이 잘 돌아갈 것 만 같았다. 청소기 헤드에 '달칵'하고 조립한 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윙 소리와 함께 롤의 무늬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회전하기를 기대했지만 롤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최소한의 조치를 취했다는 만족감에 다시 롤이 돌아가지 않은 채로 청소기를 사용했다. 시간이 되면 서비스 센터를 가는 것을 계획하며 차일피일 아픈 청소기를 모른척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지우개를 쓸 일이 많아졌다. 지우개용 청소기도 사 보았지만 싼 게 비지떡인지 망가지고 잘 흡수되지 않아 저세상으로 보냈다. 롤이 돌아가지 않지만 흡입력이 더 좋은 기존 청소기로 책상 밑을 연신 밀어댔다. 하지만 몇 번을 밀어도 지우개 똥은 위치만 바뀔 뿐 청소기 함으로 안착하지 못했다. 청소기 롤이 돌지 않는 건 큰 문제였다.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이제는 청소기 문제가 마지노선까지 왔다는 적색 경보등에 반응해야 했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안내원은 청소기 롤을 움직이는 모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부속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4~6만 원 정도 소요가 된다고 했다. 부속을 택배로 받아 교체를 하는 방법도 안내를 해주었지만 의사를 보지 않고 약국에서 약을 사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라 서비스 센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서비스 센터에 청소기를 안고 갔다. 이렇게 간단히 올 수 있었는데 몇 달 동안 왜 힘들게 살았을까 물음표가 머리 위로 떠다녔다. 물음은 잠시 제쳐두고 청소기 문제의 정확한 진단을 위해 센터에 들어갔다. 자동문이 열리고 2층으로 다급히 올라가려는데 1층 직원이 나를 가로막았다.


"고객님, 가전은 저희 매장에서 수리하지 않습니다. 다른 서비스 센터를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큰맘 먹고 청소기를 들고 왔는데 이 큰 서비스 센터에서 핸드폰만 수리한다며 다른 센터를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고장 난 채로 쓸까 싶었지만 이왕 발 벗고 나섰기에 길 찾기 어플을 이용해 다른 서비스 센터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내가 있는 곳과 가야 할 곳 모두 지하철 가까이에 있었다. 초보 운전이라 모르는 동네로 차를 가지고 갈 수 없었기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청소기를 끌어안은 채 지하철을 탔다.


차 만 이용할 줄 알았기에 쇼핑백에 청소를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응급실에 가는 사람처럼 청소기를 안고 집에 있던 차림새로 슬리퍼를 신고 달려 나왔는데 지하철까지 타게 될 줄이야. 꽃다발을 끌어안았다면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 좀 더 다정했으련만, 청소기를 안고 타는 나를 의아하게 보는 시선에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 25분 만에 서비스 센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카트에 청소기를 내려놓았다. 응급환자가 실려가듯 의사 선생님께 실려가는 청소기를 보면서 수리 비용이 많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롤을 빼고 전원 버튼을 돌렸을 때 모터가 돌아가는 것을 집에서 확인했기에 큰 지출이 예상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손에 들고 있던 대기 순서 번호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안경을 쓰고 친절히 응하는 서비스 센터 직원분께서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터에는 이상이 없으며 모터를 연결해 주는 부속의 체결 부분이 부러져 있어서 롤이 헛돌았다고 했다. 롤 만 새것으로 교체하면 된다는 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새로 산 청소기 새 롤을 보니 이전 청소기의 체결 부위가 부러졌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새 롤을 교체하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롤의 나선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청소기를 고친 것 외에도 배터리를 업데이트해 주시고 모터 상태까지 확인받을 수 있었다. 정기검진을 받고 온 것처럼 개운한 마음으로 서비스 센터를 나섰다.


예상했던 가격보다 저렴하게 2만 5천 원을 주고 수리를 마쳤다. 가격이 주는 안도감과 청소기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미제 사건을 해결한 것 같은 기쁨이 감돌았지만 쉽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모른척한 나를 돌아봤다.


시도해서 안 되는 일보다 하지 않기에 이뤄지지 않는 것들이 많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지만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며 불편하게 살아온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청소기 롤이 돌아가지 않아 청소를 해도 개운하지 않고 한 번 밀면 될 것을 다섯 번이나 돌려가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을까. 일의 해결보다는 더러움을 눈감고 불편함을 끌어안은 채로 살아가는 나는 헛도는 청소기 롤처럼 헛된 살림을 해왔던 것 같다.


롤을 교체하고 청소기를 돌려보니 원래 청소기가 이렇게 성능이 좋은 것이었나 놀랄 지경이다. 스치기도 전에 먼지들이 빨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효자손으로 등 긁듯 시원한 느낌이다. 청소 시간도 배로 줄어들었다. 부속 하나 교체 했을 뿐인데 새것 같은 느낌으로 청소를 하다니. 살림도 내 삶도 헛돌지 않게 문제를 파악하고 알맞은 방법을 택한다며 더 나아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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