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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Apr 19. 2024

세탁조 청소를 미룬 처절한 대가

호러 영화를 본 것처럼 등골이 오싹해지는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미루고 미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세탁기 세제함을 꺼내 화장실로 갔다.


세제를 넣을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는 곰팡이들이 눈에 보였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낸 지 며칠.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자잔~세제함 뚜껑을 열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주 청소하는 편이 아니긴 했지만 간간히 세제함을 청소할 때 얼룩정도로 묻어 있던 곰팡이들이 우거진 숲을 형성한 것처럼 세제함을 덮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도 무서워서 일단 청소용 칫솔을 들었다.


하아.. 해도 해도 너무 했다. 이지경이 될 때까지 무엇을 한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하얀 세제함을 점령한 검은 얼룩들과 마주했다. 칫솔이 가장 강력한 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물을 뿌려가며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떼를 벗겨냈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세제함은 본래의 하얀 민낯을 드러냈다. 몇 번의 반복적인 행위를 반복한 결과 혼수로 해올 때와 같은 하얀 세제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제함의 글씨는 세월의 흐름을 기억하며 흐려졌지만. 너였구나. 원래 이런 아이였는데 청소 전, 방치된 채 관리되지 않은 세제함은 본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간단한 몇 가지 행동으로 이런 유혈사태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탁을 끝낸 후 세제함을 활짝 열어놓았다면, 세제함 뚜껑을 열어서 물이 마를 수 있게 해 주었다면 곰팡이들이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을 마련하지 않았을 텐데. 한 달에 한 번 세제함을 꺼내 청소해 주는 5분의 수고를 했더라면,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세제함 청소를 하는 일로 다리가 저린 일은 없었을 텐데.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깊은 후회가 밀려든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일들의 반복이다. 분말 형태로 된 세탁조 청소 세제를 주기적으로 돌렸다면 세탁조 쉰내를 멀리서부터 맡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 또한 나를 괴롭게 한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꿀 수 없으니 청결함은 잃고 더러움을 얻었지만 이제라도 관리라는 것을 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 부쳤다.


어쨌든 외양간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철저한 분석이 필요했다.


 '왜 세탁조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가'

'세탁조 청소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발견한 진실은 하나였다. 발 디딜 틈 없는 베란다 구석에 있는 세탁기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까치발로 겨우 발을 디밀 수 있는 베란다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는 드라이아이스가 공기 중에서 흩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만다.


원인을 찾은 후 해결에 돌입했다. 겨울잠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꼼작도 하지 않던 몸이 부지런히 움직거리기 시작했다. 정리라는 탈을 쓴 채 돌돌 말려 쌓여 있던 비닐을 정리했다.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있던 종이봉투와 비닐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더니 꽉 찬 짐들 사이 세탁기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에 박차를 가해 케이스에 담긴 물건들을 종류별로 수납하고 정리했더니 레드카펫이 깔리듯 훤한 베란다 바닥이 드러났다. 이제 세탁기 앞에 앉아 고무 패킹 청소라던지 세제함을 꺼내 청소할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것이 최선..


10년을 사용했지만 주기적으로 관리한 세탁기와 새로 샀지만 한 번도 관리하지 않은 세탁기 중 어떤 것이 더 위생적일까? 아마 주기적인 관리를 해 준 세탁기라는 생각을 하게 다. 아무리 새것이라고 해도 한 번 사용하고 나면 물이 닿는 제품이고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다. 매일 닦아주고 주기적으로 청소해주지 않는 '관리'가 없다면 새것은 헌 것만 못할 것이다.


비단 세탁기뿐이겠는가. 청소기, 건조기, 식기 세척기 등 사용하는 모든 청소 용품들은 꾸준히 관리해야 더 위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깨끗하게 옷을 세탁을 해주는 청소 용품인데 오히려 가장 청결하게 관리받아야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폭넓게 보아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에 '관리'의 소중함을 느낀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다고 나를 뒤로 하는 경우가 많다. 끼니를 대충 챙겨 먹는 것은 예사이고 나의 마음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다 우울감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 세탁조에 곰팡이가 관리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엄마의 삶에도 검은곰팡이가 낄 때가 있다. 아이 먼저 남편 먼저 챙기며 나를 돌아보는 것을 미루다 엄마 혹은 아내 역할에 가려져 내가 보이지 않는다.


세탁기에 다가가기 위해 짐을 모두 거둬낸 것처럼 아이들이 등교하고 남편이 출근한 짧은 시간에 온전한 나를 바라보기 위해 글을 다. 엉덩이를 붙이고 화면을 바라보며 하얀 창에 주저리 생각을 써내려 가다 보면 쌓여있던 마음의 짐들이 선반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일주일에 글을 한 편 완성하는 것으로 마음의 얼룩도 세탁되어 상쾌한 기분이다.


세탁조 청소를 미룬 대가는 처참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직시하고 보니 '관리'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세탁조 청소하듯 마음을 닦아내기 위해 글을 쓰는 이유는 활자로 적힌 내용이 머리에 박혀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를 높이기 때문이다. 비록 나의 세탁기가 그간 곰팡이로 고생했을 테지만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소창 행주로 물기와 얼룩을 닦아내듯 세탁기도 엄마인 나도 광나게 반짝거리는 앞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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