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없이 이어지는 등교전쟁에서 화두가 되는 것은 그날 입어야 할 옷과 아침밥 메뉴이다. 옷이야 이제 전 날 입을 것을 챙겨 놓으라고 했지만 아침밥은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 귀찮아서 혹은 아이들이 아침을 잘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주기 일쑤였다.
갑자기 엄마가 집에 없다면?
몇 년 전 남편과 아이들만 남겨두고 집에 없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어떻게든 아이들의 아침을 해결해야 했고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간단한 식량인 식빵과 초코잼을 사 왔다. 달콤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동안 아이들의 아침식사였다. 시리얼을 먹더라도 설탕이 적게 들어간 곡물 함량이 많은 것을 먹이고 싶었지만 달지 않아서 못 먹겠다고 숟가락을 놓아버리는 건 남편이 먼저였다. 호랑이 기운만큼 설탕이 듬뿍 담긴시리얼이 녹아 만들어진 우유 한 사발을 마셔야 가볍게 아침을 먹은 것 같다고 한다.
평소 7시쯤 일어나서 하는 일은 아이들 아침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 일이었다. 글을 쓰거나 필사 혹은 그림을 그렸다. 내 안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다음이 보였다. 눈 뜨자마자 압력밥솥에 밥을 안치던 친정엄마와는 다른 삶이었다. 내 손에는 쌀 대신 키보드 혹은 펜이 들려있었다. 글을 쓰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아이들도 어제 늦게 잤으니 좀 더 재우는 착한 엄마인척 하지만 알고 보면 사리사욕을 채우며 나를 돌보기 바빴다.
학교 가기에 빠듯한 아이들에게 트러블 없이 차려줄 수 있는 것은 간편식이었다. 시리얼 혹은 빵에 잼을 발라주면서 '내일부터는 밥을 줘야지'하는 죄책감을 정성 들여 쌓았다.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높게 쌓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친정엄마의 제철 밥상을 먹고 온 뒤로 '그래도 밥을 먹여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있는 친정에는 때에 맞게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풍성했다. 오이, 가지, 고추, 상추 등 안개 같은 수분을 뿌려대며 신선도를 유지하는 마트의 신선제품을 능가하는 식재료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구워서 간장만 찍어 먹어도 고기 맛이 나는 가지는 제철 음식 중 으뜸이었다. 40년을 살면서 가지 맛을 처음 먹어보는 아기라도 된 것처럼 친정엄마의 가지구이를 내 앞으로 당겨와 먹었다.
친정에서 올라오면서 따 올 수 있는 것들을 죄다 모아 가져왔다. 등교를 하기 전 컴퓨터 앞에 앉고 싶은 마음을 뒤로 미루고 싱크대 앞에 섰다. 어떤 밥을 해야 아이도 나도 쉽게 한 끼 해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김밥'이 떠올랐다. 한 입에 쏙 넣어 먹으면서 영양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음식으로 김밥만 한 것이 없었다. 계란을 싫어하는 딸에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속이며 먹일 수 있겠다며 아침부터 김밥을 만들었다.
김밥을 말고 있는 나에게 딸이 다가와 말했다.
"엄마, 오이만 넣고 김밥 해주면 안 될까?"
단백질을 보충하고 야채도 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기어코 계란은 먹기 싫은 딸이었다. 여기서 양보할 것이냐 한 발짝 뒤로 물러설 것이냐 엄청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계란을 넣은 김밥을 되새김하듯 입안에 물고 있는 아이를 보니 일보 후퇴를 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다 달았다. 어쨌든 빵과 시리얼이 아닌 해조류 김과 탄수화물 밥, 식이섬유이자 제철음식 오이의 콜라보니까. 건강식으로 아침 한 끼 식사를 마쳤다는 뿌듯함과 싸움 없이 등교전쟁을 마치겠다는 생각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이의 수분을 빼는 귀찮은 일은 하지 않았다. 음식은 간단하게! 오래 두고 먹을 음식이 아니기에 채칼로 오이를 채 썰어 김 위에 깐 밥 위로 이불을 덮듯이 쌀이 보이지 않게 도독하게 올려주었다. 오이라도 많이 먹어라. 하루에 야채 먹을 일이 별로 없는 딸을 위한 극약처방이었다.
자고로 김밥이라고 하면 마요네즈 듬뿍 섞은 참치, 햄, 우엉, 당근 등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야 입안에서 조화롭게 폭죽 터지듯 맛을 느낄 텐데. 오이만 넣은 김밥이 뭐가 맛있다고 딸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학교에 갔다. 딸이 가고 난 뒤 도마 위에 올려놓은 오이김밥 꼬투리를 한 입에 넣었다. 음? 내가 밥에 간을 잘했나? 오이만 넣은 김밥도 꽤 맛있었다. 여름의 시원한 향을 간직한 오이가 입안 한가득 퍼지면서 고소한 참기름과 간이 맞게 버무려진 밥과 함께 섞였다.
아침을 먹이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내일은 무얼 먹일지 고민한다. 물론 나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만 욕심을 내려놓고 시간대를 달리 할 뿐이다. 내 마음의 양식은 아이들이 모두 등교하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목마르다고 허기지다고 외칠 테지만 그래도 아이들 입에 들어가야 할 끼니가 우선이지... 둘 다 놓치지 않기 위해 아이의 취향을 고려한 오이 김밥을 싸고, 그날을 기록하며 나를 채워가는 풍성한 오늘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