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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관노 Mar 30. 2021

지시하지 말고 질문하라.

틀린 것이아니라 다르다.

 언젠가 TV에서 고부열전(다문화 가정 외국인 며느리와 한국 시어머니와의 갈등관계를 다룬다)이란 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시어머니가 젓가락질을 못하는 며느리를 꾸중하는 장면이 있었다. 며느리는 불편한 젓가락보다 자기 손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고 했고 시어머니는 더럽게 손으로 먹는다고 꾸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손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인구는  40%로 젓가락 30% 포크 30% 보다 많다. 그러니 젓가락이 깨끗하고 손이 더럽다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렇게 문화가 다른 것을 우리는 틀리다고 생각하고 배격한다. 

나도 다름을 틀리다고 표현할 때가 있었다. 학창 시절 쌍둥이 친구가 있었는데 둘은 성격이 너무 틀려, 한 친구 하고만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둘은 분명 다른 사람인데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맞는 친구와 친하게 진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맛 집을 찾아가서도 “어제 먹은 집과 오늘 먹은 집 맛이 왜 이렇게 틀려”라고 표현한다. 다른 집, 다른 음식을 먹으면서 틀리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다름을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배격하고 부정한다.

당신은 상대방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생각이 다르다’고 표현하는가 아니면 ‘생각이 틀리다’고 표현하는가? 정확한 표현은 ‘다르다’가 맞다. ‘다르다’는 서로 같지 않다는 의미의 형용사인 반면에 ‘틀리다’는 동사로 맞지 않고 어긋나다 또는 사실이나 답이 맞지 않을 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모습, 습관, 생각, 취미, 성격, 여건이나 환경이 같지 않을 경우 ‘다르다’로 표현해야 하고, 계산이나 답, 비밀번호, 판단, 정보, 예측 등이 어긋나는 경우 ‘틀리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상황을 대부분 ‘맞다’ ‘틀리다’란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면서 갈등을 키우고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 왜 우리는 ‘틀리다’란 말에 익숙하고 ‘다르다’ 고하는 표현에는 인색할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 교육이 미친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주어진 문제에 대답을 잘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문제에 답을 찾고 주어진 시험문제에 사지선다로 잘 찍고,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잘 전달받아 그대로 내뱉는 기술, 묻는 말에 대답 잘하고 주어진 시험문제에 답 잘 적는 것, 사유 없이 ‘맞다’ ‘틀리다’를 속도 있게 찾아 우등생이 되길 강요한다. 개념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외우고 기출문제를 열심히 푸는 것이 공부다. 그렇다 보니 시험 끝나고 돌아서면 시험에 대한 기억도 끝난다. 나는 신입사원 채용 면접 시 졸업시험 무제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곤 했는데 대부분 기억하지 못했다. 4년간의 공부도 ‘맞고 틀리다’를 가리는 일회용 시험으로 전락되면서 사고의 힘이 사라진 것이다. 사고하지 못하니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이해가 없으니 ‘다름’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조직문화에 있다. 이미 만들어진 기준이나 방법을 빠르게 베끼고 따라가다 보니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틀리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기준은 나보다 앞서가는 기업 즉 외부에 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다른 의견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외부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부 구성원들은 무조건 수용하기 바쁘다. 따라가는 것이 기업의 숙명처럼 여기던 환경에서 리더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나는 기억한다. “다른 회사는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는데?” 이 한마디가 한 곳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얼마 안 있어 우후죽순처럼 유사제품이 쏟아지는 이유다. 5년 전 허니버터 칩을 따라한 유사제품이 무려 11개가 나온 사례는 우리의 따라 하기 문화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과자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에 걸쳐 우리의 따라가는 문화는 만연하다. 

얼마 전에 따라가기 바쁜 기업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지금처럼 앞서가는 회사를 따라가는 데만 집중하면 영원히 2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대표이사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가 표정이 굳어졌다.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데 초를 치고 있다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서 다시 “여러분의 경쟁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모두가 지금 앞서가는 기업이 경쟁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따라가면서 앞설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따라가서 일등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등은 언제나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새롭게 나타난 변종이고 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였지 따라가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경쟁상대가 지금 1등 하고 있는 기업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일등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경쟁 상대를 지금 우리가 제공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원하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사람 즉 ‘고객’으로 대상을 바꾸라고 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먼저 알아서 제공하고, 고객이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을 먼저 알아내기 위한 고객과 경쟁을 해야 한다. 답은 오직 고객이 가지고 있으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경쟁사를 기웃거리지 말고 고객의 마음을 흠치 라고 했다. 이렇게 선도하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기준을 따라가는 문화에서 ‘다름’은 모두 ‘틀리다’가 된다. 

 세 번째는 조직 내 파벌 문화에 있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이 학연, 지연, 혈연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스갯소리로 최근 직장에는 흡연(담배 피우는 사람끼리 모인다고 해서 나온 말)이란 말까지 있다고 하니 얼마나 끼리끼리 문화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파벌은 직장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에 만연하면서 양극화를 키우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서지역갈등 속에 있었고, 최근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파벌의 문화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화가 무조건 배격하며 사회 갈등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최근 광장의 대립 문화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회갈등 지수가 OECD 국가 중 터키에 이어 2위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다름을 틀리다고 말하며 갈등을 키우는 우리나라 사회 지도층에 비해 미국의 정치인들은 우리와 다르다. 2008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존 메케인 후보의 답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상대 진영 버락 오바마 민주당 호보에 대한 비난의 의견을 듣고 그는 이렇게 답한다. “아닙니다. 그는 훌륭한 가장이고 시민입니다. 다만 저와 근본적인 문제에서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가 다름을 ‘틀리다’고 생각하며 갈등을 키우는 반면에 그들은 ‘다름을 인정하며 상대를 이해하려고 한다. 경쟁이 우리에게는 싸움이라면 그들은 발전의 개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아니면 남이 되는 파벌 문화가 조직과 사회를 흑백으로 갈라놓아 그 사이의 다양한 색을 보지 못하는 색명으로 만든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는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 알 수 있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그 다른 세계의 풍경은 달나라의 풍경만큼이나 영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술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세계, 즉 자신의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라고 했다. 즉 관습과 통념들로 이루어진 현재의 자신에서 벗어날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하고 그로 인하여 세계가 증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관습과 통념으로 만들어진 답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과거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고 알 수 있다면 우리도 충분히 증식할 수 있다. ‘다른 세계란, 새로움이고 미래이기 때문이다. ‘다름’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몰랐던 것, 경험하지 못한 것, 가보지 않은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관용을 필요로 한다. 관용은 열린 상태이고, 마음을 열고 외부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하기도 하다. 자신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배움이다. 그래서 배움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자기 경험으로만 무장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것을 상대방이 틀렸다고도 하지 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배움의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배울 때는 마음의 문을 완전 무장해제하고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낯선 것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내 경험이 작어지고 초라해지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은 기존 것을 지키고, 가진 것을 잃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생긴다. 다시 말해 경험에 새로움을 더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이다. 나의 경험에 새로움을 더하는 활동이 필요하다. 그 활동이 바로 질문이고, 질문을 통해 학습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질문하는 리더뿐 아니라 구성원들의 학습역량도 효과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질문은 생각을 동반하고 성찰을 전제하기 때문에 질문하는 문화와 학습문화는 다르지 않다. 리더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이유도 없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구성원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모르는 것은 질문하면 된다. 어제의 방법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 내일의 문제를 해결하고 선도하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의 차원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찾는 것이 이미 존재하는 정답이어서는 안 되고, 따라가고 중간을 강요하고 기계적으로 자기 일에만 매달리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을 상대방이 틀렸다고 하지 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배움의 기회를 놓친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빛이 너무 밝아졌기 때문이다. 별은 그대로 밤하늘에 있다. 처음 조직에 들어와서 한창 일하고 일이 재미있을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고 다르게 보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맞고 틀리다만 있지 다름은 보이지 않는다. 다름이 보이지 않으니 배움이 없고 배움이 없으니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의지하는 등불을 꺼야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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