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할아버지 #3
이 글은 3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캠핑을 그리워하는 12살 아이의 관점으로 쓰였습니다.
산
내 이름은 산이다. 아빠가 지어 주신 이름인데 생각할수록 산을 좋아하는 할아버지와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할아버지는 산을 사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꽤 오래된 것만은 확실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오셨는데 그때도 산을 찾아다녔다고 들었다. 보통 유학생들은 교통과 생활이 편리한 시내에 사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차로 한참을 꼬불꼬불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는 산속에 살았다고 한다. 파리 시내에서 내내 속이 답답하고 불편했는데 그루노블 산 자락에 가니 속이 뻥 뚫렸다고. 산속에서의 삶은 불편한 것 투성이었다고 한다. 교통편이 마땅하지 않다 보니 온 가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움직여야 했고, 할아버지만 외출하는 날은 엄마와 할머니는 그곳에 고립되었다. 하지만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고 그 덕에 할아버지는 눈길 운전을 마스터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눈길 운전은 할아버지 전공이었다. 엄마가 어릴 때에는 넓은 공터에서 차로 눈길에서 미끄러지는 놀이(?)도 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한 번도 못해봤다.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이상한 신혼여행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신혼여행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재미있고 황당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때는 제주도가 가장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신혼여행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명산 등반에 나섰다. 산신령들께 결혼 신고를 하고 축복을 받아야 한다나? 아무튼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4박 15일 동안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반을 목표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때는 2월. 아직 산속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눈도 많이 왔다. 첫 등반지인 설악산 입구에 가는 데에만 꼬박 차로 6시간 걸어서 2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서울 마장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 용대리까지 6시간, 그리고 거기서 2간을 걸어 백담사에 도착했다. 그곳 산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대청봉에 올랐다니 참 대단한 신혼여행이다. 더 재미있는 건 이 여정에 할아버지 친구 3명도 함께 했다는 것. 이상한 할아버지에 이상한 친구들이다. 꼬박 하루가 걸려 대청봉에 올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눈이 너무 많이 온 탓에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더 험했다고 한다. 길이 눈 속에 파묻히고 미끄러워 절반은 엉덩이로 내려왔다고 들었다. 남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웃기고 재미있지만, 그게 우리 할머니 일이었다고 하니 좀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어쩌다 할머니는 이런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을까?
북악스카이웨이
우리 집은 북악산과 북한산,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다. 할아버지는 내가 돌 무렵부터 자주 산에 데리고 다니셨다. 올라갈 때는 같이 걸어가고 내려올 때는 배낭처럼 생긴 캐리어를 타고 내려왔는데,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올라간 덕에 나는 내려오는 길에 매번 골아떨어지곤 했다. 우리가 가장 자주 가던 코스는 북악스카이웨이 길이다. 우리 집 뒷산을 따라 4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데, 서울시내 전경이 모두 내려다 보여서 인기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내가 힘들지만 그곳을 오르던 이유는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늘 열이 많고 더운 체질이다. 산에 땀을 흘리며 올라 먹는 아이스림 맛은 정말 꿀 맛이다. 탁 트인 곳에서 바람이 불어 겉도 시원해지고 아이스림으로 속도 시원해지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우리는 늘 단골 메뉴를 먹었다. 할아버지는 메로나, 나는 빠삐코~~
에베레스트
할아버지는 해외 캠핑 여행도 많이 다녀왔는데, 젊은 시절 유럽에서 유학하면서 다닌 캠핑 이야기나 10년 전쯤 다녀온 몽블랑 트레킹 이야기도 자주 들려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캠핑 이야기는 에베레스트다. 할아버지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2에 하루간 머물렀는데, 빙하가 갈라져 생긴 깁고 좁은 틈인 크레바스를 작은 사다리에 의지해 건넌 이야기나 꽁꽁 언 시체를 본 이야기는 온몸에 털에 삐쭉 서도록 생생하고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네 살 때였나? 할아버지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에베레스트를 가자니까 데려다준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하얀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왜 에베레스트에 눈이 없어?”했더니 할아버지가 말했다. “여기 에베레스트 아니야” 이렇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했을까? 에베레스트에 가자고 조르는 내가 귀찮아서? 낑낑거리고 산을 오르는 날 보며 얼마나 웃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살짝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