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할아버지 #6
이 글은 3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캠핑을 그리워하는 12살 아이의 관점으로 쓰였습니다.
계란밥과 라면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요리는 딱 3가지였다. 계란밥, 라면 그리고 고기구이. 우린 캠핑을 할 때마다 이 메뉴를 먹었다. 아침엔 계란밥, 점심엔 라면, 저녁엔 고기구이. 환상의 메뉴다.
할아버지가 해주는 계란밥엔 햄도 들어있는데, 햄을 안 주는 엄마랑 살다 보니 이게 아주 별미다. 할아버지는 라면을 꼬들하게 끓이는 걸 좋아한다. 예전 군대에서 상관이 라면 끓이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더는 하고 싶지 않아서 퉁퉁 불은 라면을 끓여갔다고 한다. 그 이후로 절대 라면 심부름 하지 않았다고.
할아버지는 보통 국물에 밥을 말아 드셔서 면은 모두 내 차지다. 이런 면에서 우린 아주 궁합이 잘 맞았다. 물론 모든 궁합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소음을 매우 싫어했다. 나는 답답해 죽겠는데 차 창문 여는 일만은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우린 매번 이 일로 다퉜다. 머리가 하얀 60대 할아버지와 5살 꼬마가 창문 버튼을 두고 벌인 신경전은 대단했다.
와인과 클래식
할아버지는 와인을 좋아했다. 10년 전쯤 와인스쿨에서 공부한 적도 있는데,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는 와인스쿨이 자기 최종학력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생각과 생각을 모아 더 큰 생각을 만들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했다. 또 '생각이 고프면 책을 읽고 마음이 고프면 술을 마신다'고도했다. 할아버지는 예전에 러시아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러시아 속담에 ‘술은 남기면 눈물이 된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냥 술이 마시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언제쯤엔가 내가 저 말을 이해할 날이 올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는 밤이면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어린 내게는 포도 주스를 따라 주고 할아버지는 와인과 치즈, 김 같은 간단한 안주를 챙겼다. 이때 빠지지 않았던 안주는 음악이었다.
할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클래식. 얼마나 좋아했느냐면 결혼할 때 어른들이 주신 돈으로 오디오와 LP를 사셨다고 한다.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할아버지는 그랬다. 내가 유일하게 할아버지에게 혼난 기억도 앰프를 망가뜨렸을 때니까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 시골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음악을 크게 틀고 불 앞에서 와인을 마시는 일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음악 들으러 오라고 초대를 하곤 했다.
우린 캠핑장이나 시골집을 오가는 차 속에서, 비가 오는 텐트에서 베토벤의 합창, 운명, 월광, 생명의 양식을 함께 들었다. 클래식 음악과 와인은 환상의 짝이었다. 나와 할아버지도 그랬다. 차 창문 여는 것만 빼면 감자튀김과 케첩처럼, 삼겹살과 구운 김치처럼. 우린 그런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