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Jun 05. 2024

일기예보의 적중률

아직까진 2%

20. 8. 어느 날



단단히 엉망이 된 것 같았다.라고 태연한 척 얘기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이랬다.


망했다. 그것도 완전 제대로.

 

아무것도 쌓은 것 없는 서른.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그게 정말 내가 될 줄은 몰랐다. 코앞에 와있는 현실에 무력하게 앞통수를 제물로 바친다. 곧이어 (머리를 쥐어 싸매지 않을 수 없는) 미래를 그려보다 아득해지는 기분에 잘 붙어있는 입술 각질을 긁어내 성질머리를 인정하듯 기어이 쥐어뜯었다. 피가 난다. 아씨. 더 짜증이 나는 건 이 비릿한 맛이 꽤나 익숙하다는 거지. 내 손으로 더 피를 낼 때가 아니다. 충분히 쥐어 터졌으니까.


준비하던 단편영화 촬영이 때아닌 긴 장마로 인해 한 달 뒤로 밀렸고, 나는 드디어 지쳤다. 다방면으로 꼬이고 있었거든. 그즈음 본가에 들렀고,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고, 톡 밀면 끊어질 듯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멘탈이 결국 끊어져 버렸냐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돌아가고 싶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돌아가고 싶다는 것을 전제로 한 해맑은 물음에도 나는 그저 땅에 디뎌진 발바닥의 감촉과 그다음 떼어낸 발걸음을 어디에 붙일지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꾸린 현실에 자부심이 있었다. 노력하지 않아 보인다는 한마디를 줄곧 응시하고 있을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하는 영양가 없는 생각이 의식될 정도로 불어남을 느낀다. 떠오르는 그 의심에 한 번쯤은 동조해 볼까. 고민하며 나는 더 가라앉았다.


 

베란다 문을 열더니 그 앞에 식탁 의자를 끌고 가 자리 잡은 엄마는 밍밍한 커피를 홀짝이며 요새 빠진 노래를 흥얼흥얼 거리다 외출을 했다. 나는 집에서 오분 거리 동네 빵집을 다녀왔다. 제 자리가 아닌 곳에 덩그러니 있는 의자를 끌어올까 하다 새로 내린 차가운 커피와 방금 사 온 파이를 봉지째 들고 그냥 털썩, 그 자리에 앉았다. 20년이 넘도록 새로울 것 없는 바깥 풍경을 멍하니 보다 머그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두리번 거린다.


찾은 곳은 베란다로 가는 길목 오른쪽 구석의 책장. 가장자리에 겨우 컵을 얹어놓고 허리를 펴니 꽂혀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장에는 엄마가 결혼을 하면서 싸들고 온 세계문학 전집이 자리 잡고 있다. 견고한 양장본에 금박으로 꼼꼼히 박아 넣은 제목, 두꺼운 종이로 된 겉 커버까지 있는 꽤 신경 쓴 패키지. 소중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타지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옷가지 외에 유일하게 챙겨 온, 이전의 삶에서 무엇을 그토록 애정한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품이니. 사실 내가 기억하는 중에 엄마가 책을 읽는 모습은 별로 없다. 어린 시절 하굣길에 보이던 그늘 아래서 날이 새도록 책을 봤다던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던가 하고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꿈을 놓친 게 확실한지는 알지 못한다. 먼지 쌓인 수북한 책더미를 보고 있자니 조금 슬퍼졌을 뿐.


 나도 그럴까. 결국 치이다 놓쳐버릴까.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책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이곳에 왔을까. 습한 기운이 자꾸만 의식 속에 눌어붙는다. 장마 아니랄까 봐.

  깨끗하게 씻어내기에 가난한 나는 습기를 머금은 채 또다시 비를 기다리며 서늘한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내가 팬 발자국이 그린 점선. 그 안으로만 비가 내리는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기억력이 나쁜 나는 자꾸만 우산을 잊었고, 애매한 풍경을 확인하려 손바닥을 뻗어볼 새도 없이 빗방울은 쏟아져 내렸다. 물에 젖은 갱지마냥 퍽퍽하게 불어 터진 살점은 장난스런 손길에 움찔해 볼 힘도 없이 그저 뚝뚝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죽을 듯이 양팔을 감싸 안고 어딘가로, 적어도 이곳은 아닌 곳으로 뜀박질을 쳤나 보다.


간신히 만난 좁은 차양 아래로 몸을 비집고 들어서서 그제야 눌러 내리던 팔의 힘을 풀어본다. 머리가 젖는다. 쓴웃음이 난다.


고개를 들면 온통 눈부시게 햇살이 부서지는 나라. 내가 선 차양 안으로만 뚝뚝 비가 내리는 나라. 다가오는 사람마다 엉덩이에 분을 바르고 꺄르르 웃는 아가처럼 보송한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 나를 뒷걸음치게 만들던, 그런 나라에서 살던 날들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됐다. 순수한 사랑 가까운 선호라기보다는 어떤 마음을 일게 하는, 시절과 감정이 담긴 이 나쁜 날씨를. 쏴아- 하고 세차게 비가 내리면 이번에는 우산을 챙겨 들고, 내 가진 것 중 가장 큰 우산을 가지고 신이 나 비 맞는 세상 구경을 나선다. 비가 새지 않는 5평짜리 원룸 입구에 쪼그려 앉아 비가 새던 6.5평짜리 원룸에 살던 때를 떠올리며. 속 빈 공갈빵마냥 쉽게도 부풀어올라 한기에도 습기에도 부질없던 월 40만 원짜리 벽처럼 위태로운 피부 한 겹을 덮고서.


머리가 젖지 않는다. 역시 비가 오는 날이 좋아, 하고 지껄여 본다. 우산 쥔 손에 힘을 주고 여전히 덜 마른 축축한 마음으로 흡족하게 웃어본다.


비 내리는 날이면 생각한다. 맑은 날일거래, 따위의 양심 없는 예보를 녹음인형마냥 흘리며 늘 장마전선에 걸쳐있던 나의 나라. 믿기 어렵던 그 나라의 일기예보는 얼마나 맞아 들어가고 있는지. 변해가는 건 예보인지 날씨인지.

이전 04화 늙음 지수 중간점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