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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06. 2024

명상을 합시다

정신집중의 발버둥

19. 10. 20+24. 6. 6



특별히 별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쩐지 일진이 사나운 것만 같은 날이다. 그런 감각이 이어지려는 날이었다. 라디오를 틀어놓는 것은 뒷동산이라도 올라 야-호-- 질러볼 여력조차 없으니 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바에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활보하지 않으리라 하는 다짐이다. 멀티태스킹이란 것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일에 질려 흔들리는 눈빛을 감춰보겠다는 심산이랄까.


나의 절반을  라디오에게 떠맡긴다. 힘이 들 땐 하늘을 봐. 하는 가사에 코웃음 치고는 좁고 긴 창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한눈에 담지 못할 하늘을 나는 창문만 하게 본다. 문 밖의 감당 못할 현실을 자꾸만 창문만 하게 보는 습관. 보기 좋지 않으니 고칠 것을 종용받는 팔자걸음 같은 습관을 고집스럽게 몸에 매달고 나는 또 익숙한 걸음으로 피난을 떠난다.


나의 1/4쯤을 창 밖으로 내밀어본다. 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는다. 더 가까워질 무언가도 잡히는 것도 없지만 자꾸만 허공에서 무언갈 찾는 습관. 왼손으로 연필을 쥔다고 손등을 찰싹 맞은 어린애처럼 억울함 한 꼬집 섞인 마음으로 더 고집스럽게 왼손에 힘을 주고 꾹꾹 그 언젠가로 향하는 지도를 그린다. 내딛는 땅은 늘 지도에 없는 곳이지마는.


죄다 어디론가 내맡기고 네 조각 중 겨우 하나만이 내 것 같다.  이럴 땐-


  

-구 명상법


벽에 걸린 뷔페의 자화상과 눈이 마주쳤다. 사랑하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그렇게 우울한 눈으로 보지 마.라는 대사는 왠지 뜨끔하니 취소하기로 한다. 팔레트를 들고 맨발로 이젤 앞에 서서 나를 보는 뷔페의 눈을 피하다 보니 나도 무언가 그려내고 싶은 순간이 시작된다. 이럴 때는 구. 구를 그려야지. 각을 보면 반듯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지만 구는 유일하게 나누고 싶은 충동이 들지 않는 도형. 녀석의 공평함에 잠깐 울컥해 주고, 속이 울렁거릴 땐 구를 그리면 된다.


애석하게도 구는 그리기가 힘들다. 면으로 나눌 수 없는 막막함. 부분이라는 것이 없는 온전함 앞에서 얌전하게 칠을 해나갈 수밖에 없다. 새하얀 출발선 앞에서 두려움을 참아낸 후에, 기막힌 초벌의 형편없음을 모른 척 견딘 후에, 수 없이 해칭을 겹쳐도 미완인 중벌의 버거움을 지나 보낸다. 이때쯤 머릿속은 구로 가득 매워진다. 어떤 날에는 수많은 구, 어떤 날에는 하나의 거대한 구. 나는 하나의 커다란 구를 좋아한다. 내가 한별이라서일까. (참고로 내 이름의 뜻은 별 하나가 아니라 큰 별이다.)


자, 여기까지 구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 하지만 완성은 없다. 아니, 정해져 있지 않기에 모른다. 얼추 구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그렇게 정하기로 한다. 그것이 오늘의 완성. 전형에서 벗어난 나의 습관들이 괜찮은 것만 같은, 심지어 꽤 특별해지는 기분이 든다. 답이 없음을 답이 없음으로 완성해도 무방하다는 확인서를 한 장 그려냈다. 그리하여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리하여 그린다는 것은 사랑이며, 구는 짱이다. 짱구는 못 말리지.



-모동숲, 그리고 포켓몬 명상법(new!)


모여봐요 동물의 숲.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 전부터 새로이 시작된 나의 명상법. 한때는 노트에 체크까지 해가며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명상다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던 때가 있었다. 효과적이었다.(특히 어디에 효과적인지 모르겠다 싶은 곳에 효과적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비움과 집중. 결코 브레인포그와 게임중독이 아니다. 또한 이 문장이 변명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혀두고 얘기하건대, 나는 게임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다. 나의 20대는 마치, 1. 망망대해에서 저 멀리 뿌옇게 보이는-실은 보인다고 믿었던 목표를 바라본다. 2. 무거운 파도를 거슬러 겨우 손톱만큼의 각도로 목표지점을 향해 뱃머리를 옮긴다. 3. 무한반복.


처절한 밤바다의 이미지만이 일렁이는 날들이었다. 이렇게 고집스러운 선장에게 게임이라니. 당치도 않은 한심 함이다.(솔직히 게임에 대한 편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이번주 나의 보물 2호는 닌텐도.)


생산성, 효율, 완벽, 잘하기, 잘하고 또 잘하기, 비워두지 않게 하기에 미쳐있던 때가 있었다. 무엇을 하든 이유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어야 하고, 시간낭비는 참을 수 없는.


하지 않던 것(또는 짓)들을 해본다. 고인 물 같은 취미들을 조금씩 변화시켜 본다. 생각보다 즐겁다. 웃긴 건 이 와중에도 이놈의 활자와 그림과 춤은 피카츄마냥 끊임없이 소환된다. 그런 것들이 있다. 나를 지탱해 주는. 포켓볼로 돌아와.


포켓몬은 귀엽다. 귀엽다가 진화도 한다. 피카츄는 라이츄가 되고 야돈이 셀러에게 물리면 야도란이 되고. 잔인하지만 물려야 진화하는 세계. 나도 포켓몬인가. 제자리걸음만 돌다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은 날이 더 많지만, 뭉친 종아리를 두드려 안부를 물어주고 이내 걸음을 이어가 보는 나는 언젠가 야도킹이 될 거야. 야돈이 라이츄가 될 수 없음 또한 받아들이며. 기질이란 놈을 이길 의지가 없다. 현명함인지 무력함인지 모를 일이지만, 이 또한 부단히 생의 퀘스트를 깨 가는 이에게 주는 보상이라 믿으며 소중히 챙겨 넣어 본다. 실은 그냥 더 꼬장꼬장한 야돈 놈이 되어가는 것 만 같다. 이대로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한 몸에 모든 포켓몬이 깃들 순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야돈의 명상일기. 자야지. 아니, 모동숲 조금만 더 하고.


  

가로막는 것이 때로는 감히 담지 못할 것을 마음에 담기도록 그렇게 해주기도 한다. 창문만 할지라도.  

  

또 다른 할 일로 떠나기 위해 내밀었던 내 1/4쪽을 챙겨 넣고 보니 네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정하지 못한 손가락 끝이 까져있다. 정신을 집중하려 갖은 애를 쓰지만 사실 나는 이런것마저 명료하지가 않다. 작은 생채기에 호들갑 떠는 저맘때쯤의 귀여운 기억도 저릿한 따가움도 이제는 지루한 책장을 넘기듯 턱을 괴고 쳐다볼 수 있게는 됐다.

 

손가락을 지려 씹고 나는 내 피를 빨아 삼킨다. 실은 조그만 상처에도 언젠간 솟구쳐버릴까 겁에 질려있지만 훌륭한 명상법 덕택에 내색 같은 건 배우지 못한 사람의 얼굴로 그저 쪽쪽 비릿한 내음을 삼킬 수 있다. 겨우 피 몇 방울을 잃고는 왠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주르륵 빠지는 힘의 목덜미를 기어이 잡아끌고 동시에 나는 다시 걷는다. 명상을 한다. 사라지는 것을 잡았다 여기며 그 희망으로 나는 걷는다. 명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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