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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12. 2024

만성 인생 암흑기

그리고 계절성 화병

24. 6. 12



테이저건을 기다리며, 장래희망 변경 요망: 과녁.


누가 날 좀 쏴줬으면 싶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최고온도 30도. 혼미해진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어질 한 몸뚱이를 이끌고 30도의 한낮을 살아갈 내일이 까마득하다. (아는 게 힘일지 모르는 게 약일지는 당신의 선택.) 제정신을 붙잡기도 버거운데 날씨까지 오락가락. 또 혼미해진다. <실미도>의 명대사가 절로 지껄여지는 생의 한복판이다. 날 쏘고 가라!


끈질긴 태양빛에 한 바가지 땀을 잃고 언짢아진 마음은 갖은 미사여구로 호들갑을 떨어본다. 병명은 계절성 화병. 또는 만성 인생 암흑기 스트레스. 걸음이 느린 내 뒤통수의 모양새를 아는 이는 없다. 계절 역시 늘 나를 앞질러간다. 30도만큼 끓지 못하는 의지박약을 질책하듯 몰려오는 여름에 짜증으로 맞선다. 실체는 없지만 꾀병은 아니다. 엎어지기 일보직전.


정신을 차리는 것, 지겹지 아니한가. 쓰러질 의사는 다분하나 사라질 용기는 없기에 테이저건으로 적당히 타협한* 머릿속은 철컥거리는 밀덕의 애장품들로 가득하다. 진짜는 아니지만 그럴듯하다. 터져버리기 일보직전.


*보다시피 나는 타협에 능하므로, 세상과의 대치를 지질하게 끌고 있는 이 기막힌 현생의 순간은 기형적 상태일 뿐이다. 이것이 디폴트값처럼 보인다면 착각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라는 말을 일단 믿고 보는 마음씨 고운 사람이 되시길 바란다.


헬스장이 모퉁이마다 증식하는 것 같다. 늦기 전에 오라 한다. 멋쟁이가 되고 싶었으나 자꾸만 지각쟁이가 된다. 세상의 요구에 발맞춰 살아내지 못하고 언제나 반 걸음씩 늦는 사람. 가차 없이 쏟아지는 빛에 눈을 맞추고 대들어본다. 내 걸음이 그렇게 느린가요. 내 보폭이 그리도 좁은 가요. 첫 번째 호소가 채 끝나기도 전에 눈이 내리깔린다. 태양이 태양의 특성을 가진 것이 억울하다. 절여진 눈시울을 보니 아직 청춘인가 보오. 등줄기는 축축해진 지 오래지만.


신년계획이 조정된 지도 오래. 들뜬 마음 위로 세워진 (실패가 예견된) 무리한 계획은 운명인 듯 당연스럽게 패배감과 손을 잡는다. 마치 정체기를 맞은 다이어터. 재촉하는 날씨에 마음만 조급해진다. 잦은 다이어트가 잦은 노력이라 배우지 못하는 세상. 노력이 잦아질수록 요요에 다다르는 이 얄미운 인체의 회로와 가혹한 생의 회로는 동일선상에 있다. 잦은 버둥거림은 잦은 나락의 방증이 될 뿐인 세상.


만성이 되어버린 암흑 속에서 시력을 잃고 발버둥 같은 춤을 춘다. 메마른 땡볕 아래서 물가에 빠진 듯 다리가 무겁다. 오늘도 걸음이 느리다. 달아오르는 정수리를 식혀가며 미지근하게 고집을 부리는 효율 없는 반골. 머저리 같지만 괜찮다. 만성이 되었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뜻. 곧 희미하게 시야가 밝아져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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