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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n 14. 2024

잠수해고

데스노트는 안 씁니다.

24. 6. 13



꼬르륵. 잠수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굳이 곤란하지 않더라도.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잠겨버리고 싶을 때가 온다. 미안하게도 그런 사람이라서. 하지만 노력한다.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잠수이별. 아니, 잠수해고를 당했다. 살다 보면 어떻게 가능한가 싶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것도 꽤나 종종. 알잖나. 상식을 뛰어넘는 인간의 끝없는 이기적 가능성과 다양성에 힘입어 오늘도 ’되는 게 없다 ‘ 프리퀀시가 적립되었습니다. 여전히 ‘이런’ 인생의 vip 고객. 10개를 모으면 폭탄이 하나!


정답을 고르시오.

1. 잘렸다. 2. 그만뒀다.

단박에 수동태와 능동태라는 단순한 풀이 기준이 세워지는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그 정도로 해사한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있는 나의 풀이법은 사소한 문제 하나에도 자존심의 멱살을 끌고 온다. 이 사실조차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의 자격지심일 테지.


자아실현과 직업적 목표를 동시에 이루어내 얻은 높은 평판으로 연 1억 정도는 우습게 모아 한강뷰를 보다 잠들고, 세상의 기준에 연연하지 않음으로 개성을 지켜냄과 동시에 이성적이기까지 한 성공적인 사람이 되려면 속 좁은 세상 탓은 훌훌 털어버리고 나를 상처 준 이들을 저주하지 않는 그릇이 넓은 사람이 돼라 하였다. 그러니 차분하게 앉은 자세로 깊은 명상과 자기 확언을 시작하자.


... X발. 늬들이 게맛을 알아. 나는 모른다. 게살도 발라줘야 맛이다. 껍데기까지 씹어먹는 인생은 입천장이 아물기 무섭게 헐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젠장.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을 정도로 베베꼬인 시선을 잠깐 참아달라) 것의 한조각도 갖지 못한 인간은 생각한다. 그나마 남은 것을 지켜내고 싶은지 그나마 정도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지. 앞선 문제를 다시 보자. 꼴에 2번을 고른다. 이것이 나의 답. 역시 나는 지켜내고 싶다. 남은 치킨에 온기를 더하면 다시 꽤나 먹음직해지듯. 지킬 것은 고작 자투리 같은 부서진 조각일 뿐일지라도 다시 데우고 씹어 삼키다 보면 나름 영양가 있는 인간이 될지도.


불시에 당한 비상식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에너지의 3할을 썼다. 이따위에 3할의 에너지를 축낸 것에 격분해 또 3할의 에너지를 썼다. 심호흡으로 1할을 충전했다. 반밖에 없다. 아니지 반이나 있다고 생각해야지. 생각해야지. 생각해야지...


긍정의 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이것이 아님에 슬퍼할 방법도 모르는 절름발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폭탄 돌리기 게임이 끝나질 않는다. 긴장의 연속. 다행이라면 늘 폭탄뿐인 건 아니며, (열에 아홉은 폭탄. 심지어 가끔은 다이너마이트지만.) 불행이라면 가끔 찾아오는 그것의 운용법을 익히지 못했다. 카운트다운 3초 전에 폭탄을 받아 든 사람처럼 어떤 긍정을 손바닥에 올려두고 전전긍긍. 진땀을 흘리며 서있다. 잔뜩 끌어안지도 퍼뜩 던져버리지도 못한 채 감당하지 못하고 마는 아름다움. 버겁다. 성악설과 성선설. 자신 있게 하나를 택할 확신은 없지만 꿈이 있다면 다짐은 해야지.


신사적인 폭탄 돌리기에 대하여 선서.

사정없이 터져버린 폭탄에 인디언밥을 맞은 등짝의 얼얼함은 익숙하나, 얻어맞은 오기로 살아간다 하지 않겠다. 끓어오르는 수치심에 판을 엎지 않겠다. 한판더. 를 외치는 목소리에 구태여 서늘함을 얹지 않겠다. 터지는 폭탄을 줄곧 얼싸안고 거뭇하게 뒤덮인 인생을 탓하는 편안함에 잠기지 않겠다. 생의 비장함을 장난스레 걸지 않겠다. 잃은 것을 갚아주고 말리라 생각지도 않겠다. 시간이 되면 떠나겠다. 익숙한 것과 사랑할 것을 구분하겠다.


맞다. 난 때마다 잠수정에 몸을 맡긴 채 가라앉고 싶은 무거운 사람. 가보지 못한 심해를 그리워하는 의심스런 향수병에 걸린 사람.


그리하여 작은 빛을 안다.


오늘은 좀스러운 날이다. 그럼에도.라는 부사로 내일을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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