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별 Jun 16. 2024

어디에 이르렀는가

24. 6. 14 -1


잘 살아보기엔 속이 메스껍다. 멀미 없는 삶에 영혼을 팔고 싶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이라면 슈퍼스타의 하루나 억만장자의 잔고도 아니며, 귀여움에 껌뻑 죽는 집사를 간택한 고양이의 인생도 아니다. 다만 속 개운한 삶. 궁금해 미치겠다. 엄마는 평생을 앓아온 나의 유난스런 어지럼증을 생기다 말아서.라는 말로 단박에 정리했다. 한숨도 쉰다. 그러게 나를 왜 만들다 말았어.


먹먹해지는 머릿속을 잠재워보려 달고 살던 이어폰과 잠깐의 이별을 고했다. 장점도 있다. 귀에 크고 작은 호빵을 얹고 고개를 처박은 자세로 진화한 MZ 호모사피엔스의 생명을 위해 건널목 바닥에서 반짝여주는 초록빛에 불나방처럼 이끌리는, 앞서가는 인기척에 목숨을 맡기고 냅다 뒤를 밟는 시대의 뒷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이가 울려대는 녹빛 절규를 인지하지 못한 채 물소 떼처럼 우르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간다. 세계가 너무나 익숙한 듯 흔들림 없는 표정의 NPC처럼 가슴 앞에 단호한 대사를 띄워 놓은 채로. 나도 바빠요. 박차를 가하던 사이렌 소리에 당황 비슷한 것이 적잖이 묻어나는 것만 같다.


그렇게 한 번의 초록불을 보냈다. 앞서가는 저들보다 얼마나 뒤처질까. 양심을 지켜낸 결과로 별스런 걱정을 더하게 되는 세상에 멀미가 도질 위기. 하지만 괜찮다. 느지막이 들어선 지하철 역사 안에서 머지않아 익숙한 뒷모습들과 조우하게 될 테니. 같은 열차에 실려 저마다의 목적지로. 얼마나 일찍 도착했나요. 어디에 이르렀나요.



24. 6. 14 -2


사랑에게.

짝사랑. 두고 온 사랑. 혹은 희미해진 사랑. 그리고 이제는 잃어버린 사랑조차 잠시나마 우리를 들끓게 한다. 사랑이었다는 이유로. 그대의 눈을 빛나게 한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면 깨닫는다. 희미하게 박동하는 나의 사랑을. 사랑을 잃는 괴로움을 알고, 사랑을 받는 자신을 깨닫고, 사랑을 전할 줄 아는 투명함 가진 그대를 보면 알게 된다. 나의 메마름을. 다정스러운 것들을 온통 얼굴에 얹고 사랑을 말하는 그대여. 얹어진 미소 아래 숨겨진 그대의 외로움을 안다. 그대의 슬픔을 본다. 그저 그것의 존재를 알아챌 뿐이지만. 초라한 나의 얼굴까지 반짝 비쳐 보이도록 빛나는 눈동자 가져 고마운 이여. 행복을 바란다.


추신. 진경아 결혼 축하해.


과거를 공유한 이들과 함께 현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천운이다. 여전히 곁을 내어주는 친절 같은 세심한 마음 한켠을 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햇살이 떠오르는 날의 일기를 기대해 주는 이와, 이유 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이, 만난 적 없는 나를 때마다 들여다보아주는 이들이 건네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다. 잠시나마 그런 순간에 이르렀다니.


우리는 마주할 때마다 꿈을 이야기한다. 같은 꿈을 가졌던 우리는 조금 지치고, 꽤나 변했고, 그리고 여전히 서툰 지금을 웃으며 말할 수 있다.


괴로움도 이야기한다. 가득한 고뇌를 보자기에 폭 싸서 혼자로 돌아온다. 싸들고 온 품 안의 것을 조심스레 열어 그 앞에 쪼그려 앉고는 별안간 숨을 참고 쓰다듬어 본다. 바닥에 닿아 절망했으나 짚은 다리에 힘을 주고 튕겨올라 약간의 반등에 성공한다. 어디에 이르렀는가.



24. 6. 15


독서토론 3시간 반 전. 회피의 옷자락을 질질 붙잡게 하던 책을 펼칠 때가 왔다. 한쪽을 읽고 괜스레 뜨개질을 하고 또 한쪽 읽고 실을 뜨고. 뜨고 읽고를 반복하다 뜨개질을 하려고 책을 훑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의 집중력은 어디쯤 이른 거니.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단다.

마음먹기 싫어요. 맛없어요. 인스턴트가 맛있어요.

그러다 넌 바보가 된단다.

먹는 거랑 상관없거든요.


바보가 되기에 이르렀다. 엄마 말은 대체로 맞다.

이전 10화 잠수해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