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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09. 2024

삐끗한김에 추는 춤

스텝 4. 삐끗.


오른쪽 발목을 삐었다. 테니스를 배우러 간 첫날이었다. 첫날부터 무얼 하다 그랬느냐 하면, 튕겨나간 공을 주우러 달려가다가... 까지 쓰고 보니 나도 참 얼척없이 사는구나 싶다.


종종 헬스장에 갈 때 신던 용도 모를 실내용 운동화를 덜렁 들고서 테니스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준비완료의 신호인척 유유히 나타났으니. 순식간에 발목은 돌아갔다. 악. 머쓱한 마음에 괜찮은 척 수업을 이어갔으나, 점점 부어오르는 발을 보고 결국 방문한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고 나왔다. 아,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즐거이 재잘거리던 나의 설렘이여.  3주를 쉬었다. 사실 아직 괜찮지 않으나 이쯤이면 괜찮지 않은가 하며 하루하루를 전전긍긍 보내다, 포기하기로 했다. 삐끗한 김에 쉬어가자.




왜인지 나는 자꾸만 삐끗한다고 생각했다. 부서지고 쓰러진 것까진 아닌데 늘 삐끗삐끗. 그렇다고 수시로 후회의 늪에 빠져들고 과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미래의 멱살을 잡아채고 빨리 나타나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라고! 흔들흔들 협박을 하면 했지. 애원보단 위협이 낫다고 굳게 믿었건만. 발등을 찍힌다.


한때의 자부심이 언제나의 밑거름이 되지는 않더라. 세상은 참으로 야속하게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벼려가지 않는 이에게 무엇도 내어주지 않는다. 아니, 주는 것을 받겠다는 생각보다는 자급자족을 마음먹는 것이 속 편한 길이다. 상황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마음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새로이 나를 가다듬을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하더라. 때가 되면 처음부터 다시,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만 같다.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게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그리 슬플 일은 아니다. 익숙해질 일.




살다 보면 오고야 마는 큰 변곡점들. 그 몇 번째 파도 속에서 울렁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다행히 절망의 계곡을 빠져나오는 중이지만, 첫 (소위 상업)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난 뒤의 나는 조금 심각한 상태였다. 데뷔작이 무사히 공개되었는데, 내 속에선 상상했던 반응이 일지 않아 당황했다. 오히려 이제껏 나를 버티게 했던 모든 것이 와르르. 땅이 꺼졌다. 이전에 쓰던 방법들을 뒤지고 뒤져봐도 이 상태를 벗어날 묘수를 찾을 수 없었다.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지난 20대의 거의 모든 것이라 단언할 수 있던 꿈의 조각들이 단단히 길을 잃었다. 이랬다면 혹은 저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심지어 질색하던 생각들을 하고, 직업인으로서의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분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얼마간의 작품 홍보 활동 기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증발하고 싶었다. 최소한 지구는 아닌 곳으로.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잠깐의 열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요즈음의 추세가 그렇다. 모든 것이 참으로 빠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무너져 구멍 난 자리로 추락해 발목이 덜컹댔을 때에야 소곤대던 소리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새로운 태엽을 감을 때라고.


얼기설기 엉망이 된 머릿속은 자꾸만 나를 조급한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 지금까지의 인생은 무얼 위한 것이었나 의심이 싹틀 것만 같은 불안. 불안. 불안. 모든 것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도 나를 즐겁게 하던 것들이 무섭도록 즐겁지 않아 바닥만 헤집는 날들을 꽤나 오래 보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신이 나 사는 것 같았다. 어느 쪽을 둘러보든 망했다, 결론지어지는 인생. 그만두고 싶었다.


아니, 해결하고 싶었다. 뿌연 시야에 발까지 삐끗해 버렸지만, 그래도. 잡히지 않는 안개를 내 손으로 걷어내고 싶었다. 희망은 늘 무언가의 너머에 있다. 손을 뻗어야 한다. 필요한 건 조금의 용기. 하나를 깨고, 또 하나를 깨어내고, 또 다음을 깨어 나가고자 하는 차분한 용기. 그리고 여유.




늘 부족하고, 늘 아쉬운 나를 스스로 채워주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도리가 없다. 얼마간의 절망의 계곡을 겨우 지나오면서 내가 택한 방법은 덕지덕지, 갖은 용기를 칠해본 여유와 배움. ​이 방법이 좋더라, 저 방법이 좋더라 말들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 무엇이든 진득하게 돌아보고 제대로 시도해 볼 여유다. 방법을 찾아 헤매기만, 혼란 속에서 마음을 졸이기만 하며 살지 않도록. ​이런 시간이 필연적인 때가 온다. 그럴 땐 온갖 것을 다해 집중해야 한다. 겁에 질려 눈을 피하지 않고. 겁에 질리더라도 눈을 피하지는 말고. 정면돌파. 결국은 가장 탁월한 길이다.


​불안 없이 살 수 없다. 필요하다. 하지만 날아드는 모든 것을 나에게만 주어지는 세기의 고뇌라 오해하게 만드는 자기 연민은 잠깐 걷어내고 볼 필요가 있다. 비교를 멈추자. 허덕이게만 되는 걱정의 늪에서 빠져나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것을 위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나잇값을 하고, 자식 노릇을 하고, 성과를 이루어내고, 재산을 모으고, 어느 정도 보편적이라 일컫는 모종의 사회적 흐름을 따라가는 일에선 도태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훗날의 거름이 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확신으로,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지켜보려 애쓰는 일상은 자부할만하다.


이유없는 긍정이 쉽지 않은 사람이다. 밝은 미래를 당연스럽게 떠올리기까지 수도 없이 주저앉다 결국은 다시 몸을 일으키는 고된 순간이 반복돼야 할 테다. 두 발로 버티고 선 시간이 엉덩방아를 찍는 순간을 넘어서도록. 나는 그제야 희망을 떠올릴 테니. ​반복 중이다. 언젠간 습관이 되겠지. 나는 이런 습관 가진 사람이고 싶기에.




쉬는 동안 새하얀 테니스화를 준비했다. 나의 발목을 단단히 지켜줄. 더 이상 그 언젠가에 나의 조각을 뚝 떼어 쉽사리 내어주지 않겠다. 다짐도 해본다. 배워보고 싶은 것들, 배워야 할 것 들을 잔뜩 배우고 지금을 느끼고 기록한다. 다시 나를 찾아간다. ​나를 향한 인정이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 혹은 어느 정도의 풍파를 버텨낸 후에야 비로소 줄 수 있나 보다. 이제야 진심으로 나에게 말을 건넨다. 이런 시간이 이어지다 보면 누군가의 응원도 만나게 되더라. 열광적 환호는 아니더라도 따끈한 시선 정도는 받아볼 수 있더라.


부러지지 않으려 버티다 꺾여보는 것, 나쁘지 않다.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다시 몸을 풀고 준비할 수 있다. 여기저기 솟아나던 기대와 긴장을 털어낼 수 있다. 아픔 뒤에 바람 들던 빈자리가 아문다. 자유롭고 꾸밈없는 나의 순간들로. 덕택에 이제는 삐끗하는 엉뚱한 춤에 픽.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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