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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별 Jul 16. 2024

단정하게 흐르는 춤

스텝 5. 플리에


발레에 플리에라는 동작이 있다. plié. 프랑스어로 구부리다, 접다 라는 뜻. 말 그대로 양다리를 구부리면 된다. 바를 잡고 서서 가장 먼저 하는 순서도 플리에다. 가장 먼저 시작되는, 가장 쉽고 간단한 동작.


유튜브덕에 눈이 참 높아졌다. 한때는 물 건너 비싼 값을 치러야 볼 수 있던 진기한 것들도 이제는 가타부타 설명할 것도 없이, 누르면 나온다. 라떼는 말이지, (몇 년 전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로잔콩쿠르 같은 권위 있는 발레 콩쿠르 영상을 보려면 일정이 모두 끝나고 비디오가 나오길 기다렸다 누군가 그걸 사들고 와서야 무용학원에 옹기종기 모여 영상을 볼 수 있었더랬다. 요새는 어떤가. 거의 실시간으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을 침대에 누워 세상 편하게 본다. 공연 영상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하면, 눈만은 참으로 높아진 우리는 영상 속 그들처럼 높이 뛰고 많이 돌고 싶어 진다. 세상 편하게 누워서.




성인이 되어 다시 취미로 발레를 시작했을 때 이게 얼마만인가 하는 감격도 잠시, 기억 속 움직임과 다른 몸뚱이의 가동범위에 적잖이 놀랐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몇 해의 공백이 있었나 세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 싶게 두 손이 주먹을 쥐고도 접을 손가락이 모자랐다. 그래, 안 되는 게 당연하지. 그때와 다른 건 당연하지.라고 머릿속을 가라앉히면서도 두 손은 여전히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팽팽 돌아가던 턴도 가볍게 날아오르던 점프도 지금 차오르는 숨에 비해, 그 시절의 나에 비해 보잘것없는 꼴을 하고선 뒤뚱거릴 뿐이라니. 우습게도 취미 생활에 오만 스트레스를 받으며 오늘도 세 바퀴 돌기는 실패했네, 제대로 중심을 잡고 착지하지 못했네, 더 버티지 못했네, 다리가 덜 찢어지네, 더 높이 들리지 않네, 못했네, 안되네, 못했네, 안되네를 반복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되어 주먹 쥔 손바닥에 손금 같은 손톱자국을 새겼다. 미련하게 성실하게도.


여느 때처럼 비장한 턴을 돌던 어느 날,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방아를 만회하려 있는 힘껏 뛰어 오른 순간, 힘이 풀려 무릎을 꿇으며 땅에 꽂혔다. 엉덩이도 무르팍도 정말이지 그리 아프진 않았는데, 집에 와서도 어딘가 자꾸 콕콕 찔리는 기분. 분명 통증을 느껴 병원을 갔건만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들은 것만 같은 머쓱한 기분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멍청하게 누워 있다 잠이 들었을 거다.


다시 눈을 뜨고부터였다. 나의 취미발레 암흑기. 실력은 야속하게도 지독한 퇴보의 길을 걸었다. 잘 되던 것도 도저히 하무뭇한 정도로 되지가 않는. 그러면서도 인정하지 못했다. 이건 나의 진짜 실력이 아니라고 박박 우겨대며 현실과 이상 사이에 푸르르 힘 없이 끼어있던 풍선에 후후 바람을 불어넣었다. 결국 싫어졌다. 수업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쌓여있는 수강권을 몽땅 날려버릴 배포는 없어 어쩔까 하다 지루하겠다며 훌쩍 건너뛰었던 낮은 레벨의 수업을 들어갔다. 슬슬 몸이나 풀자 하고 들어간 수업에서, 가장 쉽다 생각했던 첫 순서 플리에부터 갖은 지적을 받았다. 온갖 것들을 허투루 하면서 잘해 보이는 것에나 혈안이었던 지난날에 화끈거리는 몸을 겨우 땀으로 눈속임하고 집에 돌아와 또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멍청한 잠을 청했다.




내가 하려던 것은 춤. 묘기가 아니었는데. 시작과 끝, 선택부터 결과까지가 하나의 움직임인 것을. 포물선의 가장 높은 한 점만 떼어내 밟아대는 것은 치졸하고 불안한 일이지 않나. 무언가를 택한다는 것은 나를 끓어오르게 한 동기부터 그것이 끌고 올 결과까지 어찌 됐든 받아들여 보겠다는 다짐. 모든 과정이 나의 것이다. 좋은 결과만을 쏙쏙 골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참을 찾지 않은, 노력하지 않은 빈 시간의 결과가 자리할 곳이 오지에서 검색한 배달의 민족처럼 텅. 비어 있음을 억울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도움닫기 없이 높이 뛸 수는 없다. 준비 없이 핑그르르 돌아갈 수만은 없다. 안전한 착지 없이 순조로운 다음 스텝을 밟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두 발로 땅을 꾹 눌러내 흔들리지 않을 플리에, 나의 선택의 시작이다. 곤란을 겪어본 이로서 말하건대, 플리에가 ’가장 먼저‘인 이유를 ’가장 쉽다 ‘로 받아들이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늘 ‘가장 중요한’ 무언가이기 때문에.


부족함을 인정하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잘해야 한다.’로 빼곡히 쓰여진 머릿속 깜지를 줄줄 외다 한 번의 실수로 겁을 집어먹고는 목이 떨어져라 절레절레 부정하던 그것. 현실, 그리고 그 속의 공포를 인정하면 오히려 당당해진다. 긴가민가 하지만 알고 있다고 결론 내린 것이 실은 모르는 것이었다는 걸 인정하면 진정으로 필요한 배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휘적휘적 더 높이 오르려 급급하게 내딛던 걸음에 심호흡 한 숨을 섞는다. 엉망이 된 인과관계를 단순한 한 줄로 주욱 풀어낸다. 그 자연스러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미 일련의 과정을 겪고 어딘가에 도달한 이의 화려한 모양새만을 지익 찢어와 나의 그것과 대어 보기 시작하는 순간, 노력은 뒤틀린다. 방향 잃은 노력은 억울해지기 십상이다. 억울함이 사리분별을 가릴 만큼 짙어지는 순간 제풀에 지쳐 손을 놓아버릴 수밖에.


현란함은 필요 없다. 가지런한 플리에로 준비하고 깔끔한 플리에로 마무리 짓는다. 단정하게 기본을 지키면 단순한 동작도 꽤나 볼만한 춤이 된다. 자연스럽고 성실한 움직임은 혼을 쏙 빼가진 못해도 나무랄 데는 없을 것이다. 나로부터 비롯돼 충분히 눌러낸 시작, 걸맞은 과정, 그리고 다시 정성스레 펼쳐낸 마무리면 충분하다. 요상한 묘기는 그만두고 춤을 추자. 물 흐르듯 아름다운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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