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노트

대온실 수리 보고서

부서진 삶을 수리하고 앞으로의 삶을 소망으로 재건하는

by 행복맘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행복이가 78일째 되는날 완독한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

부끄럽게도 창경궁이 1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궁’ 이외에 다양한 의미와 쓰임을 한 곳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때는 근대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대중적 야앵의 배경지로,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여러번 의의를 달리한 끝에 잔존한 창경궁 대온실은 어쩌면 ‘생존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주인공 영두는 창경궁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그 공간 주변에서 때로는 한가운데에서

본인과 주변인들이 함께 지나온 시절을 떠올린다.

공간이나 삶이나, 현재까지 그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안에서 “부서진 삶”을 수리하고 앞으로의 삶을 “소망”으로 재건하는(책에서 인용)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면서 나 역시 수리하고 싶은 인생의 한 조각이나 시절 인연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도 구멍이 나거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묻어 더이상 입지 못한다며 옷장 구석에 처박아둔,

한때는 너무 아끼던 옷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버릴 수도 없고 간직하기도 애매한 옷 같은 나의 20대.

열등감과 자유에 대한 끝없는 열망과 세상에 대한 욕심과 사랑에 대한 뜨거움으로 가득찼던.

그것들이 한데 뒤섞여 질긴 오기와 축축한 감성으로 표출되었던 모든게 서툴던 시절.

그때를 떠올리면 때로는 안쓰럽다.

온 마음을 다해 살아냈던것 같기도 해서 기특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 만난 인연들에게 그때의 나를 받아줘서, 견뎌줘서, 사랑해줘서, 고맙다.

단지 외면해 버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꼬매도 보고 리폼을 해보는 방법도 있음을.

혹은 그저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다시 반짝이는 무언가로 간직할 수 있음을 안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던 책.

아이와 함께할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1.

그런 은혜에게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뭘 숨기고 싶었다기보다 어려서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커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떤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떠올리거나 반추하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그 시절의 모든 것은 결국 창백하게 축소되어 초라해지기만 했다.

2.

마주하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시시해졌다. 바람이 한번 불고 지난 뒤의 모래사장처럼 마음의 표면이 평평하게 균형이 맞춰지는 게 느껴졌다. 고작 그 시시함으로.

3.

장마가 그런데 어쩔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4.

분명 귀하게 자랐어.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끝장나 버리는 일을 겪었겠지, 과거 얘기를 잘 안 하는 걸 보면.

5.

나를 태우고도 순신은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도로를 달렸다. 노란 보안등이 켜진 율곡터널과 긴 담장의 종묘와 탑골공원과 종로를 일주하는 내내 우리만의 거리가 이어졌다. 신호대기에 걸려 자전거를 멈춰 세웠을 때만 대화를 나누는 조용한 드라이브였지만, 그 틈을 어떤 말로 채워넣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만히 침묵할 때 오히려 뭔가가 더 힘 있고 따뜻하게 부풀어올랐다.

나는 폐점시간이 되어 문이 다 닫힌 종로의 귀금속 가게 앞을 지나다 “나 너 사랑해!“하고 나도 모르게 고백했다. 나도 나지만 순신은 정말 놀랐다. 걔는 자전거를 세우고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하고 물었다. 마치 그런 괴상한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투였다.

”사랑한다고“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1. 오래도록 마음으로 기억될 것 같다.

6.

내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던 순신이 ”너 성당 다니는 애였어?“ 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거기서 뭘 배우냐고 다시 물었다.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2. 오래도록 마음으로 기억될 것 같다.

7.

영두씨는 자기 세계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그랬거든. 시간이든 생각이든 한번 하고 버리는 게 아니라 남겨두었다가 거기에 다시 시간과 생각을 덧대 뭔가 큰 걸 만들어가는 사람 같다고.

8.

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자신의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자기를 둘러싼 어른들이 세파에 휩쓸려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9.

누구에게나 있는 시절이고 모두가 겪고 지났을 시간인데 왜 아이들을 보면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다.

10.

그 겨울 교실 창밖으로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 나는 조용히 다가오는 빛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머니가 다가오는 이유를 나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를 구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텅 빈 내 눈 안으로 들어와 정신을 차갑게 깨우는 사랑이라는 걸.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 사람을 믿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11.

”필요하면 언제든 도울게요. 증언도 할 수 있고요.”

나는 원장에게 말했다. 그 시절에 대해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힘을 찾기 위해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이제 별다른 상념 없이도 내가 입은 상처의 형태가 그려졌다. 그러니 그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길에서도 나는 아주 안전할 것 같았고 리사와 만나는 일도 더이상 꺼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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