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압둘 가사지의 정원]

그림책이 철학이 되다!

by 이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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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치와와 종의 반려견을 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갈색 털에 몸통은 길고 가늘었고, 아담한 체구의 녀석이었지요.

그녀석은 아마도 가족 중 제가 가장 만만했나 봅니다.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저는 종종 문밖에서 잠시 서성였습니다.

혹시나 들려올지도 모를 그 녀석의 기척 때문이었지요.

집 안에서는 졸졸 저를 따라다니며 짖어대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저는 피아노 의자 위로 올라가 누군가 제발 그 녀석을 데려가 주길 속으로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제게 성질을 부리던 녀석은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곤히 잠들곤 했습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이 잠든 얼굴을 바라볼 때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 녀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발밑에서 숨결을 고르게 고르며 잠들어 있을 때, 비로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이 그림책을 읽으며,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되살아났습니다.

어릴 적 치와와의 성격을 닮은 프리츠의 강아지를 따라, 저는 어느새 그림책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프리츠와 앨렌 미츠 둘의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천천히 책장을 넘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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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반 알스버그 작가는 미국의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글과 그림을 모두 스스로 만들어내는 창작자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분명히 나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으며, 이야기 속에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결말은 언제나 열려 있고, 해석은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아이들에게는 모험과 신비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되고, 어른들에게는 잠시 멈춰 서서 삶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철학과 사유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헤스터 아주머니가 기르는 개, 프리츠는 성질이 고약합니다. 잘 물고, 잘 짖어대는 탓에 사람들에게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지요.

결국 프리츠는 앨런에게 잠시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둘만 남겨진 어느 오후, 앨런과 프리츠는 산책길에 나섰다가 뜻밖의 것을 발견합니다.

길 한가운데 놓인 다리 하나였습니다.

절대, 절대로! 개를 정원에 데리고 들어오지 마시오. <은퇴한 마법사 압둘 가사지>

다리를 건너던 중간, 둘은 표지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앨런은 발걸음을 멈추고 되돌아가려 하지만, 프리츠는 그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원 쪽으로 내달립니다. 쫓고 도망치는 짧은 실랑이 끝에, 프리츠는 정원 어딘가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프리츠를 찾아 헤매던 앨런은 마침내 한 저택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압둘 가사지를 만납니다.

앨런은 프리츠를 데려갈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귀여운 프리츠를 돌려줄테니 따라오너라


과연 마법사 압둘은 프리츠를 무사히, 그리고 곱게 돌려보내 주는 것일까요?

그러나 마법사가 내어준 것은, 본래의 모습이 아닌 오리로 변해 버린 프리츠였습니다.

그 모습을 건네며 압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법을 푸는 건 오직 시간뿐이야. 몇년이 지나야 풀릴수도 있고, 하루 만에 풀릴 수도 있어. 자, 이 오리를 데리고 돌아가라. 다시는 이곳에 오지말고


오리로 변해 버린 프리츠를 안은 채, 앨런은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던 중, 오리가 된 프리츠는 앨런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가 쓰고 있던 모자를 낚아채어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걱정을 안고 걸음을 옮긴 앨런은, 무거운 마음으로 헤스터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벌어진 엄청난 일들을 모두 털어놓지요.

그 순간, 믿기 어려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바로 프리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개의 모습으로 다시 그 자리에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앨렌, 너도 알겠지만, 이 세상 그 누구도 개를 오리로 바꾸지못해. 그 마법사는 단지 오리를 프리츠라고 믿도록 너를 속인것 뿐이란다.


앨런은 마법사 압둘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제는 마법을 믿을 나이는 지났다고, 스스로를 단단히 설득하지요.

그런데 앨런이 집으로 돌아간 사이, 프리츠는 앨런의 모자를 헤스터 아주머니 발치에 떨어뜨립니다.

이 말썽쟁이야! 앨렌 모자를 가지고 대체 무슨짓을 하는 거니?


프리츠는 정말로 오리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일까요?

앨런이 겪고 보았던 모든 일은 현실이었을까요? 아니면 한낮의 꿈이었을까요?

그 모든 상황을 온전히 알고 있는 존재는, 어쩌면 직접 그 시간을 지나온 프리츠뿐일지도 모릅니다.

앨런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만, 프리츠가 오리로 변하는 순간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고, 그저 마법사 압둘의 말과 눈앞에 놓인 상황을 믿었을 뿐이니까요.


문득 장자의 꿈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꿈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던 사람이 아침에 깨어나면 슬픈 현실에 울곤 한다. 꿈에서 슬피 울던 사람이 아침에는 즐겁게 사냥을 나가기도 한다.꿈에서는 꿈인 줄 모른다. 꿈에서 그 꿈을 점치기도 한다. 꿈을 깬 뒤에야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또한 큰 깨어남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삶도 큰 꿈임을 안다. 어리석은 자들은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아는 체를 하여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지만 고루한 일이다. 나는 당신과 더불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꿈이다.<제물론>


꿈과 깨어 있음의 차이를 구분하려는 순간, 우리는 보통 명료함을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정확하다, 객관적이다, 분명하다… 이런 단어들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이제 현실이야”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또 다른 종류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현실을 보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우리는 실재를 직접 만나는 대신, 개념을 통해 세계를 살아내는 꿈 속에 머무르곤 합니다. 그렇게 선택된 하나의 해석은 어느새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는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진실이라고 믿는 판단의 꿈을 꿉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세계는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되고, 나는 세계로부터 분리된 관찰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나와 세계가 본래부터 나뉘어 있다고 믿는 분별의 꿈 속에서, 우리는 이미 깨어 있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게 됩니다.


깨어 있음이란 사물과 현상을 정확히 인식하는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내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 상태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요?

꿈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뒤엉키고, 현실에서는 의미와 해석이 뒤엉킵니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마음이 엮어 만들어낸 무늬라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는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그 분명함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깨어 있음이란 눈을 뜬 상태가 아니라 눈앞의 분명함에 즉시 결론을 내리지 않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앨렌이 눈앞에 펼쳐진 프리츠의 모습을 바라보며 현실과 믿을 수 없는 마법의 세계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 장면은, 사실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분명히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 어려운 순간들을 마주하고, 그 앞에서 현실과 꿈 같은 환상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순간에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현실과 꿈 같은 환상의 세계가 겹쳐질 때, 무엇을 붙잡고 어떻게 머물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확실하다고 믿는 바로 그것이, 가장 부드러운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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