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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Oct 05. 2022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5일의 평일 일상이 있어 2일의 주말여행이 있다


빨리 월요일이 됐음 좋겠다





올 한 해가 100일이 채 남지 않았던 9월의 어느 날이었다. 9개월을 꽉 채워 살아보니, 조금씩 제주살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됐다. 여전히 일을 안 하고 하루 종일 태평하게 노는 것에는 이따금씩 감동을 받지만, 제주의 모든 것에 감탄하며 즐거워하던 때는 지났다. 어느 곳이든 살아보면 내 동네, 내 집이 되면서 그 감흥은 무뎌지고 지겨워진다. 그 지겨움이 편안함으로 느껴져서 좋을 때도 있고, 말 그래도 지루할 때도 있다. 신기한 일은 아이가 유치원을 가는 평일에는 지겨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데, 온종일 부모와 함께하는 주말에는 특히 그렇다.




1월부터 제주살이를 시작했고 아이는 3월부터 영어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년 단기로 다닐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는 영어 유치원이 딱이다. 알파벳도 잘 모르던 아이가 지금은 교재의 문장을 읽을 정도는 되었으니(물론 미리 공부한 교재만 그렇다) 그 정도면 아이 교육에 게으른 부모는 만족을 한다. 아이는 평일 아침 9시 반부터 2시 반까지 유치원을 다니고, 그 이후에는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는 학원 한 가지를 다닌다. 그렇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유치원+수영, 유치원+미술, 유치원+태권도 등등을 바꿔가며 주 5일을 채운다.












처음에는 제주살이를 하러 와서 아이에게 너무 타이트한 스케줄을 강요하는 게 아닌지 적잖이 고민도 했었다. 또 제주 도심으로 이사 오기 전 교외 지역에서 살 던 때는 유치원+학원 픽업으로 하루의 반을 쓰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제주살이 3개월 차가 지나면 깡끄리 사라지게 된다. 매일을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고들 하지만, 유랑이 천직인 사람이 아닌 이상 아이를 데리고 일 년 내리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었다. 아이와 24시간 지지고 볶고 하며 스케줄 없는 하루를 3개월 즈음 살아본 뒤 우리 가족은 절실히 깨달았다. 일상이 필요하다!




일상은 말 그래도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뜻한다. 직장을 다니던 일상이 그토록 지겹고 숨이 막혀 휴직을 했는데도 역시나 사람에게는 일상이 필요했다. 아이가 있는 보통의 집이 그렇듯 아이는 가족의 중심이다. 7세 아이의 일상을 만들어주고 어른 사람인 우리는 그에 맞춰 우리만의 일상을 만들어갔다. 날마다 반복되어도 자신의 자의로 만든 일상인지라 그 안에서 움직이며 사는 삶은 직장을 다니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고 취미 활동을 하다가 아이를 만난다. 그리고 그러한 일상의 기준은 아이의 유치원과 학원 스케줄이 되었다.




명절이나 공휴일의 개념이 사라진 공동 휴직 부부에게 달력 위의 숫자와 의미들을 아이의 유치원 안내문이 알려준다. 여름방학, 추석, 개천절과 한글날의 황금연휴 등 직장을 다닐 때는 그토록 중요했던 달력의 의미들이 이제는 매일이 ‘노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런 우리를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작은 통로가 바로 아이의 유치원과 학원들이다. 아이의 루틴을 통해 기준을 만들고 우리도 사회가 정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만의 규칙이 부여된 일상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극히 단조롭고 똑같은 5일의 평일 일상은 오히려 지루함 없이 흘러간다. 마치 월요병 가득한 회사 출근길이 어느새 눈 깜빡하면 불금으로 바뀌어 있는 직장인의 요일감처럼 말이다.












때문에 제주살이 매너리즘은 평일 5일 일상이 사라지는 주말이나 공휴일에 잦다. 평일에는 지루하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하루가 무섭도록 빠르게 흐른다. 등원한 아이가 금세 도착할 시간이 되고, 간식을 먹인 후  학원을 데려가야 하는 일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의 등하원 전후로 그 안에서 소소히 제주를 여행하듯 일상의 변주를 즐기는 평일의 맛이 가끔씩은 더 즐거울 때가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게 금요일 마지막 일정인 태권도까지 마치고 나면, 한주도 수고한 아이에게 주말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묻는다. 이제 더위는 한풀 꺾이며 좋은 날이 계속되는 제주의 가을에는 어디든 나들이하기가 좋아서 주말이면 알아서 엉덩이가 들썩인다. 또 5일 동안 자신만의 루틴을 잘 살다보면 알아서 주말 여행을 가고 싶어지게 된다. 좋은 날인만큼 유명 관광지는 어딜 가든 관광객들 인파가 엄청나다. 제주에 산다는 이점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건 평일에 시간 날 때 다녀오고, 주말에는 아이와 함께 한적하고 조용한 비주류의 도민만 안다는 관광지와 맛집을 찾아다닌다. 어쨌든 제주 짬밥 9개월 차라 오다가다 주워듣고, 또 누적된 정보도 꽤나 많다.




이른 아침에 나가서 늦 오후에 돌아와 쉰다. 그렇게 딱 2일을 제주 여행객 모드로 지내다 보면 절로, 평일이 그리워진다. 여행이 즐겁지 않았다가 아니라, 딱 2일 치 여행 감흥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는 5일 치 평일 일상의 누적이 필요했다. 지루하고 시시하고 똑같은 평일의 일상이 우리의 제주살이 9개월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매일 평일 오전에 아이는 유치원을 가고, 남편은 아침 수영을 가고 나는 요가를 간다. 이토록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했다. 제주 여행과 제주 살이는 한참이나 다른 말이다. 아이의 유치원 학기는 내년 2월이지만, 우리는 12월로 자체 종료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꽉 채운 1년의 제주살이의 마지막까지 이 시시한 평일의 일상을 유지하며 우리의 삶을 지켜보련다.





* 제목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의 소제목 중 하나를 차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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