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란 Sep 14. 2022

제주 도심 라이프

세 가족 12평 투룸 살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게 되더라





지난 7월 제주에서의 세 번째 이사를 마치고 우리의 도심 라이프를 두 달째 이어가고 있다. 조천, 한림, 애월에 이어서 제주살이의 마지막은 바로 도심의 신제주가 되었다. 약 두 달간 도심의 집과 애월 집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다가 7월에야 하나로 합치며 완전하게 도시로 들어왔다. 반년 동안 한적하고 너른 집에서 호젓한 제주살이를 즐기다 보니 집에 대한 미련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아이 유치원이 코 앞이고, 걸어서 마트와 도서관을 갈 수 있는 도시 라이프가 그리웠다. 분주했던 이사 첫날, 우리 가족은 밤 8시에도 대낮 같은 도시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사 먹고 걸어서 집으로 오는 작은 행복에 기뻐하며 설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12평 투룸 생활이 시작됐다. 완벽한 풀 옵션이 되어있던 기존 렌트한 집들과는 달리 연세로 계약한 투룸에는 “붙박이장, 싱크대, 티브이,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만 구비되어 있었다. 당장에 음식을 담을 그릇들도, 식탁으로 쓸 테이블도, 바닥에 깔 매트리스도 없다. 꼭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적으며 진짜 제주의 우리 집을 마련하듯 준비해 갔다. 음식을 해먹을 식기와 주방용품들은 볼일을 보러 육지에 갈 때 챙겨 왔고, 식탁 겸 책상으로 쓸 테이블은 당근에서 2만 원으로 거래했다. 그리고 침실에는 침대 대신 매트리스를 놓기로 하고, 분해가 가능한 몽제 매트리스를 구매했다. 그리고 다가올 여름을 대비해 이마트에서 선풍기도 샀다. 주방용품, 거실 테이블, 침실 매트리스, 그리고 선풍기가 우리에겐 가장 필요한 물품의 전부였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12평의 인테리어를 시작한다. 거실에는 테이블 하나와 캠핑 의자 한 개가 놓여있다. 테이블은 세 가족이 식사를 할 땐 식탁이 되고, 아이랑 유치원 숙제를 할 땐 아이 책상이, 내가 노트북을 할 땐 내 개인 책상이 되었다. 여행용 캠핑 의자는 윙 체어처럼 두어 한 사람만 앉을 수 있지만 시간차를 두고 번갈아 가며 앉아 쉬었다. 침실에는 오로지 매트리스 하나와 무드 조명등 하나만 두었다. 이불은 붙박이장에 넣어 두고 잘 때만 펼쳐 두고 기상 후에는 무조건 개어서 넣어 놓았다. 옷방 겸 창고로 쓰는 다른 방은 남편의 운동 용품과 자전거만를 두고 빨래 건조대를 펼쳐 말리는 공간으로 쓴다. 야외로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땐 남편은 이곳에서 자전거를 고정시키고 페달링 연습을 하기도 했다. 2층이지만 아래층이 주차장이라 아이와 남편 모두 활동에 제한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부족한 듯 보여도 더는 채워 넣을 것도 없이 심플해서 공간이 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 가족이 살기엔 작을 수 있는 12평 투룸의 최고의 인테리어는 바로 여백이었다. 만족스러운 인테리어가 끝이 나고, 비로소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남의 집이 아닌, 쓸고 닦아 내 취향을 묻혀 만든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그 때문에 이 작고 소박한 공간을 애정 하게 되었다.




이사 후 꽤 한참 동안 제주에서의 도시 라이프를 사는 일이 퍽 만족스러웠다. 제주까지 와서 왜 다시 도시인가라는 질문은 편안한 문화권 안에서 사는 안락함으로 모든 걸 함축하는 답이 되었다. 나는 이 도시가, 원래 내가 누려왔던 이 익숙함이 그저 좋았다. 세 가족의 일상이 이 도시의 시스템 안에서 매우 쉽고 편안하게 이어졌다. 요가원과 수영장, 마트와 도서관 그리고 아이의 학원이 모두 한 동네에서 가능했다. 점차 이곳에서의 삶이 여행이 아닌 일상이 되었다. 마치 원래도 살고 있었던 듯, 모든 게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도시 라이프가 점차 익숙해지고 이내 현실이 되어가자, 서서히 집에 대한 불편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매트리스는 세 가족이 자기엔 작아서 늘 발이 튀어나왔고, 좌식 테이블은 오래 앉아 있으면 무릎이 아팠다. 청소기가 없어 청소할 때마다 구부려서 쓸고 닦았고, 제습기와 건조기가 없어 제주의 습기를 그대로 받아내는 장마 기간에는 살결에 닿는 습기와 마르지 않는 빨래가 곤욕이었다. 아래가 주차장이라 뛰어도 상관없어 좋다던 층수는 지나가던 사람과 대화를 해도 될 정도로 가까워서 찌는 더위에도 항시 창문을 닫아야 했다. 폭염의 여름날 밤에도 안전의 문제로 자는 동안에는 모든 창문을 닫고, 잠가야 하는 일은 살아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여행의 낭만은 부족함도 미니멀 감성으로 만들어주더니, 조금씩 낭만이 벗겨지고 현실이라는 일상을 마주하니 불편한 게 도드라져 보였다. 자꾸만 원래 살던 육지의 진짜 우리 집이 그리워지고 비교가 되었다. 불현듯 여기서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하며 힐링하러 온 제주살이가 고되게 느껴지던 순간이 잦았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이전의 렌트한 집에서 살던 반년의 시간보다 현재의 작고 소박한 이 공간에서 사는 지금을 좋아했다. 우선 제주 도심에 산다는 것은 도시의 장점과 제주의 자연을 동시에 누리는 일이 되었다. 마당 있는 너른 집을 포기한 대신 우리는 더 자주 제주를 나다녔다. 도심의 유치원에서 하원하는 아이를 그대로 태우고 30분이면 나타는 바다에서 물놀이를 실컷 즐겼다. 주말에는 1시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제주의 곳곳을 쏘다니며 제주 여름을 그대로 몸으로 새기며 놀러 다녔다. 작은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더더욱 밖으로 나가자며 매일 주말이면 온 가족이 부지런을 떨었다. 치열했던 제주의 여름을 가장 제주스럽게 후회 없이 보냈다.  





  





여행처럼 남의 집에서 지냈던 지난날들과는 달리,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의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며 '현실'처럼 살아간다.  완벽하게 잘 꾸며진 남의 집 보다 엉성하고 모자라도 내 집이 편한 것처럼, 12평 투룸에서 우리의 모양대로 '불편한 듯 편하게' 잘 살고 있다. 청소기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툴툴대다가 집이 작아서 금방 끝난다고 좋아하는, 오늘도 그런 일희일비한 감정으로 보통처럼 지낸다.




그런 오늘이 쌓이면 어느덧 제주살이를 마무리할 날이 성큼 다가올 것이고, 오늘의 불편과 부족도 훗날의 우리 가족의 추억거리가 되리라는 기대도 해본다. 추억은 모든 걸 그립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까, 언젠가 이 궁색함도 미니멀로 미화되는 날도 오겠지.

이전 09화 코시국에 해외여행을 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