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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Nov 13. 2024

모태솔로의 결혼법

대박,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데






나의 이상형은 상남자였다. 그러니까 남자를 사귀어본 적이 전혀 없는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에게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나이차는 9살 이상. 세상을 좀 겪어본 듯한 거칠고 상처 입은 눈, 술은 아무리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주당, 겨울 냄새가 나는 담배, 잘 다듬어진 턱선보다는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턱수염. 유행과는 상관없다는 듯 자유로운 옷차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캡모자가 잘 어울리는 두상과 목젖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꾸미지 않는 거친 스타일과 본디 잘 타고난 옆선 미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팅에서 줄곧 나왔던 또래의 대학생 남자애들과 복학생 오빠라는 사람들도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내 기준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애들을 만나봐서 뭐 해. 그땐, 그랬다.



대학에 가고 보니 미팅이 아주 학과 전공수업처럼 많았다. 마음만 먹고 여저기기 손만 들어대면 주말을 제외하고(주말은 소개팅으로) 주 5일을 미팅으로 채울 수도 있었다. 술 먹고 노는 것도 좋고 술자리도 즐거웠다. 그러나 단 하나, 내 진짜 인연을 만날 수는 없었다. 대학교 3학년이 되는 동안까지 친구들은 하나둘 남자친구가 생겨도 나는 언제나 그 자리였다. 조금씩 미팅도 재미없고 소개팅도 재미없어졌다. 신촌역 1번 출구나 혜화역 롯데리아 앞이 지겨워졌다.



아, 내 인생에 사랑은 없구나. 몇 번 한 짝사랑은 술기운에 친구들이 밀어붙여 벼락고백을 하고 다음날 숙취처럼 부끄러웠던 기억들 뿐이다. 친구 녀석들처럼 좋아 죽고 못 사는 게 아닌 걸 보면 술자리에서 으레 나오는 남자 이야기에 나도 곁들일 안주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 후에는 오히려 상대가 반응할까 두려워 먼저 안녕히 계세요 하며 연락을 끊어버린 찌질함이여. 그나마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이들에 대해선 어찌나 반감이 크던지. 지금 생각하면 매너란 것도 장착하지 못한 무례하고 하등 한 인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공식만을 남기며 나는 우울한 청춘의 한 시절을 패배자처럼 지냈다.



연애를 시작한 친구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작대기를 이뤘다는 것인데, 그런 행운을 그렇게 쉽게 거머쥐다니. 모두 승자로구나. 세상 모든 커플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그를 만났다. 내 이상형의 조건에 부합하는 것은 캡모자와 목젖뿐인 세상 초식남인 그를. 심지어 처음 봤을 땐 전화로 여자친구와 다투는 모습을 보인 남의 남자인 그를. 친구의 지인인 그는 술자리에 와서는 술도 못 마시면서 안주만 많이 먹고, 심지어 대화 중에 종종 나가서 전화로 여자친구와 싸워대는 캡모자 쓴 목젖남일 뿐인데. 그런데 신경이 쓰였다. 그냥 그랬다.



더웠던 여름날 강남역에서 만났던 그를 친구들과 다시 한번 만난 건 그해 겨울 삼성역 코엑스였다. 그 사이 그는 롱디였던 여자친구와 헤어져 있었고(그럴 거 같더라), 우리는 건전하게 잠실 아이스링크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처음 타는 스케이트였음에도 나는 너무나도 능숙했고 친구 두 녀석은 자주 넘어졌다. 그는 친구들 곁을 떠나지 않았고, 나만 그렇게 선수처럼 아이스링크장에서 바람을 가르며 스케이트를 탔다. 재미없었다. 그는 내 곁에 오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며칠 후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도 그날을 기억한다. 나는 따듯한 방바닥에 엎드려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날따라 문자 소리가 조금 생소하고 낯설게 들렸다. 그였다. "뭐 해?" 그 문자를 보고 나는 몰래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마치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을 꾹 참았다.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이. 그래서 처음은 특별하고 또 그래서 무섭다.



연애를 시작하고 3개월이 지났다. 나는 결심했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나는 드디어 그 공식을 깬 첫 사람을 만났다. 다시는 이런 사람을 못 만날 거야(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다니 너무 감동스럽다. 그렇게 순수하고 어린 마음으로 생각했던 내 결심은 6년이 이어졌고 그 후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다. 결혼 전날까지도 와 이게 되네, 진짜 이루어질 줄이야 싶었다. 사람이 이래서 말하는 대로 사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이 사람과 결혼할 거야. 그전에 연애 몇 번만 더 해보고'. 그랬으면 정말 다시 이 사람을 만났을까. 몇 번의 연애 후에도 나는 이 사람을 다시 사랑했을까.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 변했을까. 하지 못한 일들 앞에서는 늘 그렇게 물음표만 넘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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