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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란 Dec 04. 2024

첫사랑, 첫 경험

사랑해 보다 좋아해가 좋아서






첫 키스는 기억나지 않지만, 첫 경험의 기억은 또렷하다.

이제 사귄 지 100일 지났고 암묵적인 예의상의 시기는 지났으니 거사를 치러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정하고 착했다. 심지어 자취를 하는 사회 초년생 직장인. 아직 모든 게 서툰 이십초반의 나에겐 대상, 장소, 시간 모든 게 완벽한 첫 상대였다. 한다면 이 사람이랑 해야겠다. 그저 나의 결심은 단순했다. 어차피 해야 할 거? 빨랑 해치우고 나도 유경험자고 되고 싶었다. 얼마나 좋아해야 할 수 있을까 막연히 상상했던 일인데, 그 대상을 그로 대입해 보니, 어? 이거 가능하겠는데 싶었다.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해 가 아니라 할 수 있어로 애정을 확인하던 서툴고 풋내 나던 그때. 내 처음이 그의 처음이 아니라서 좋았다. 민망한 사람이 둘이 아니라 하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렵고 힘들고 무섭고 부끄럽고 어쩐지 부모님께 죄송했던 내 달큼한 첫사랑, 첫 경험이 그라서 든든했다. 지난날 그가 미리 치르고 얻은 경험들이 나를 안심시켜 줄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나의 처음은 실패했던 것 같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남자의 몸은 요술봉인가)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게 된다고 싶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일 같았다. 그럼에도...어쨌든 해치웠다.



이 사랑이 그리고 이 경험이 유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 나는 통과의례를 거쳤고 진정한 교제란 걸 해본 정정당당한? 어른이라는 안도감이 생겼다. 다행히 곱고 다정한 사람이 첫 사람이라 감사했다. 앞으로 내 앞에 닥치는 사랑을 헤쳐나갈 자신감. 늘 처음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수월할테니까. 어쩐지 배포가 커졌다. 나에게 첫 경험은 그렇게 묘한 안도감이었다.



솔직히 그가 너무 좋아가 아니라 싫은 적이 없는 데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왜 그 사람의 땀은 더럽지 않지? 살결은 왜 이리 부드럽지? 좋은 냄새가 난다. 그 사람이 벗어놓은 옷들을 잘 개어 곱게 접어주고 싶다. 그저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사랑인 거야라고 어느 누군가가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니까! 나는 그저.. 그를 좋아해. 조금 많이.



이미 대선배? 였던 친구들이 해준 많은 이야기들. 전과 후가 다른 이들. 그런 상황에 대비하며 상처받지 않으려고 쿨한 척 쉬운 척했다. 그러나 평범하고도 시시하게 그는 여전했다. 그 한결같음이 좋아 그를 더 좋아했다. 언젠가 그가 사랑해라고 말해서 그를 덜 좋아할 뻔했다. 사랑해라는 말은 너무 쉽고 너무 흔해빠져서 좋아해 가 더 좋았다. 단순하고 간단한 얼굴로 나는 아이스라테를 좋아해. 나는 겨울을 좋아해. 나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좋았다. 그가 그랬다면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고 사랑할 것 같았다.



그는 한결같이 사랑해로 말했고, 나는 좋아해로 대답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의 하위 개념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순간의 큰 파동은 지속하기 어렵지만, 작고 잔잔한 울림은 오래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좋아하는 마음은 6개월이, 1년이, 3년이, 5년이, 6년이 흐르도록 계속 됐다. 어쩌면 나에게 올 수도 있는 두 번의 경험이라는 걸 까맣게 잊을만큼. 그렇게 그 사람은 나에게 첫 사람이자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그를 계속 좋아한다. 여전히 그의 땀은 더럽지 않고 살결은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난다. 여전히 그의 벗은 속옷을 주워 올려놓는다. 언젠가 부터 나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대상이 생겼다. 내 아이와 고양이. 너무나 깊고 커서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애정, 그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말 외엔 대체가 안 되는 마음. 이 사랑해는 평생 지속 가능하겠구나. 나에겐 사랑해는 이런거구나. 내 속으로 나오고 내 손으로 데려온 이 소중한 존재들에게 붙일 수 있는 말. 그렇다면 획실해졌다. 여전히 나는 그를 사랑해가 아니라 좋아해로 부르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영원히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다. 가볍고 산뜻하게 질리지 않는 좋아하는 그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는 대신, '좋아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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