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이수지, 비룡소, 2004)
-아프리카의 초원을 꿈꾸며
동물원을 가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동물원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거 보니, 우리 가족들은 동물원을 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집에서 동물원이 멀기도 했고, 부모님의 입장에서 멀미가 심한 나를 데리고 버스를 타고 동물원에 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학교에 들어가 소풍으로 동물원에 간 사진은 남아있다. 누가 찍었줬는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학교 소풍에 따라다니는 듯한 전속 사진사 아저씨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물원은 듯 하지만, 밥을 먹는 사진이다.
그런 내가 한풀이라도 하듯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는 자주 다녔다.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거 같은데, 실상 아이들은 조금만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고 하거나 배가 고프다면서 칭얼대기 일쑤였다. 그래도 봄, 가을 연례행사처럼 동물원에 아이들을 끌고 다녔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그동안 한 것들은 다 날아가는 무슨 적립 시스템처럼 동물원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동물은 아이들에게 친숙한 존재고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동물들이 주인공인 책이 많다. 결국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인데. 이수지의 <동물원>도 동물원의 세계를 다룬다. 그 안에는 아이와 어른의 세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아이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는 부모의 심정이 된다.
내가 동물원을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동물원에서 본 동물들 중에서 활기찬 동물은 없었다는 것이다. 때론 귀찮은 듯, 느릿느릿, 때론 돌아보지도 않고 잠들어 있는 동물들을 볼 때도 많았고, 심지어 우리가 비어있을 때도 많았다. 이수지 작가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동물 우리는 여기 있는데 동물들은 어디 갔을까? 한때 동물과 내 처지를 바꿔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차라리 주는 밥 먹고, 그냥 저렇게 살다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간혹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의 기준으로 날 벌주는 선생님이나 어른을 만날 때, 심지어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때, 나 자신이 동물원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열심히 “우우”소리를 내야 겨우 새우깡 하나 받아먹을 수 있는 우리에 갇힌 동물.
그래서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는 언젠가 아프리카에 가서 살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동창을 만남면 “아프리카에서 사니?”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서 이제는 도시의 정글에서 산다고 웃으며 넘기곤 한다. 초원을 가로지르는 기린과 자유로운 사자, 하물며 얼룩말의 삶을 오랫동안 부러워했다. 어쩌면 상처를 서로의 혀로 더럽다고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핥아주고 살고 싶다는 은밀한 욕망이 있었을 수도.
동물원에 산다고 느낀 것은 결국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 때문이었을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것들. 경제적 상황, 사회적 처지, 학력, 능력, 재능 말이다. 대학교 면접에서 면접관이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 뜬금없는 말. “도대체 뭘”이라는 의문이 내내 남아 있었고,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적혀 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말이 어떤 뜻이었는지 이해하는데 4년이 걸렸는데, 그러는 동안 나도 변했다. 더 이상 그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말은 결국 나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고 말처럼 되었다. 내가 얼마나 타인의 평가에 연약한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했다. 역시 난 한없이 약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선생님들 중 몇 분이 이상한 단체에 가입했다고 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관심은 없었지만, 그동안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달라져 있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를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라는 김진경 선생님의 책을 수업 중에 추천해 주셨고, 고3의 교실에서 “우리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약간은 뻥진 기분으로 앉아 있던 나에게 친구들 몇몇이 함께 모임에 가지는 제의를 했다. 그림책 속의 동물들은 우리를 나와 자신들의 세계에서 놀고 있다. 나도 당시 그런 기분을 만끽했다고 할까. 하지만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동물원이 거기 없다고 믿는 쪽에 가까웠다. 동물원을 가기 싫으니 아예 기억에서 삭제하고 지워버린다면 마음에 부담도 없다.
나에게 동물원은 평가의 구조였다면 책 속의 동물원은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일까? 동물들은 시간이 되니, 다시 우리도 돌아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우리는 동물들로 채워지지만, 결국 책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공간의 의미로서 동물원은 아직도 존재한다. 동물원에 대한 역할과 의미를 중요시하고 멸종위기종 보호에 더 의미를 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물을 전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시각들도 있다. 아직도 그 의미와 역할 동물권 보호에 대한 이야기는 진행 중인 거 같다. 나 스스로에게도. 책 속에서 아이는 커서 동물들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에서만 사는 모습으로. 아니면 자유로운 모습으로.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의 한 생애 동안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많은 것들이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고 이제야 겨우 알아간다. 극단까지 갈 것 같은 것들이 극적으로 화해하고, 화해할 것 같은 기류에도 아주 미세한 틈으로 분열될 수 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어 간다. 물론 다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나는 세상이라는 동물원에서 동물 우리를 하나도 운영하지 않겠다고 늘 다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유로울 수 있기를. 나 또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