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성과 불가피한 필요성 사이
감사하게도 나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석사 과정 중에 제네바 유엔(UN)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인턴을 시작으로 국제기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WHO 단기 컨설턴트에 이어 P2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지난 5년간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며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한국인들 중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사실 국제기구에 인턴으로 처음 들어갈 때는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 이루어지는 듯한 순간이기도 했기에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제일 컸다. 내 사진과 이름이 찍힌 파란색 유엔 사원증을 받고 제네바 유엔 본부에 여러 회원국들의 국기가 휘날리는 입구를 지나 출퇴근할 때면 내심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인턴이기에 시간이 나면 유엔 본부 안에 다양한 회의들에 살짝 들어가서 참관할 수 있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그런데 몇 주간 매일 출퇴근을 하다 보니 처음의 설렘은 금세 사라지고 유엔에서 하는 일들의 문제점과 한계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교 때 모의유엔을 하며 유엔에서 회의하는 방식은 진작 알고 있었는데, 학생일 때는 모두들 최선을 다해 각 나라의 입장과 발언문을 준비해서 회의에 참석했다면, 실제 유엔 회의장에서는 언뜻 보면 그냥 놀러 온듯한 대표단도 보이고 마냥 말만 길어지는 희의 들이 실망스러웠다. 정장을 차려입고 각 국 입장을 대표하러 나온 외교관 혹은 국가 대표들인데도 유엔 회의장에 와서 셀카를 찍고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다른 사람들의 발언은 전혀 듣지 않고 딴짓을 하거나, 자기 발언시간에만 맞춰 회의장에 들어왔다 바로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지만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유엔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대학교 때 했던 모의유엔의 토론 보다도 재미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특히 유엔에서 다루는 인권이나 세계지속가능목표 (SDG)등 국제개발협력의 개념들은 모호하고 때로는 너무 광범위해서 누구나 대충 한 마디하고 지나갈 수 있는 그런 회의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액션은 없고 말만 하는 회의는 내가 상상했던 유엔이 아니었다. 그래서 6개월간의 인턴십 끝에 나는 유엔에서는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엔이 나랑 맞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국제기구도 다 똑같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런던 중 WHO의 인턴십 자리의 오퍼를 받게 되었다. 유엔 산하에 전문기구들(specialized agencies)이 몇 개 있는데, 세계노동기구(ILO), 국제통화기금(IMF), 유네스코(UNESCO)와 같이 WHO는 그중 하나였다. 그래도 보건과 의학 관련 업무를 하려면 더 전문적이다 보니 유엔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 보았다. 그리고 오퍼를 받아들이고 시작된 인턴십. 물론 어느 부서와 어느 팀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턴의 경험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겠지만, 전체적인 기업문화와 분위기는 느낄 수는 있다. 내가 처음 느끼기에 WHO 제네바 본부는 다른 유엔 기구들처럼 상당히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곳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다자외교라는 것이 결국 200개에 가까운 회원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입장을 표명하고 투표하고 국제규범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지역사무소나 국가사무소와 같은 현장 업무는 제네바 본부의 업무와는 또 다른 분위기라고 알고 있다.
WHO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의약품의 데이터베이스 관리와 연구였는데 국제개발의 모호한 연구주제들에 비해서 보건의료 분야의 실질적인 주제들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유엔과 비슷하게 WHO에서의 업무 속도나 여러 회의의 진행 과정이 비효율적인 점은 아쉬웠다. 여러 나라 혹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으고 자문하며 정책을 세워나가고 연구해야 하다 보니 때로는 세월아 내 월아 기다려야 할 때도, 답답함을 꾹 참고 인내해야 하는 순간들도 많이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속해있던 팀은 다른 팀들에 비해 젊은 팀이라서 생각보다 더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이 경험 덕분에 나는 국제개발학 석사 공부를 하며 함께 복수 석사 과정으로 국제보건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유엔과 세계보건기구에서의 1년간의 인턴십 끝에, 나는 국경없는의사회(MSF)라는 비정부기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국제기구와는 다르게 국경없는의사회는 문제가 있으면 현장에 바로 달려가고 정책과 국제회의보다는 좀 더 실직적인 업무 위주로 일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내가 유엔에서 느낀 단점들이 보완되는 듯 보였다. 필드에서 보내준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의 데이터를 제네바 국제본부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고 분석해서 결핵전문의들의 의학적 소견을 묻는 업무를 했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사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유엔과 달리 제네바에 위치한 비정부기구들은 외교비자(Carte de légitimation)가 아닌 스위스 취업비자(Permit) 시스템을 따르는데, 한국 국적인 내가 스위스 취업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서류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언제 비자를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했다. 스위스 취업비자와 관련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스위스 비자 신청 절차를 거쳐야 하나 고민하던 중, WHO에서 일했던 팀의 매니저가 다른 팀의 컨설턴트 자리를 추천해 주었다. 지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오퍼를 받게 되었고 스위스 취업비자랑 달리 국제기구는 외교비자를 바로 받을 수 있기에 먼저 WHO의 컨설턴트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9년 10월부터 처음에는 6개월만 일하기로 했던 일이 1년간의 컨설턴트 업무가 되었다. 그런데 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나와 다른 팀원들은 코로나 백신을 보급하는 COVAX 프로젝트의 WHO 측 실무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맡은 업무는 컨설턴트가 아닌 정규직 직원이 해야 하는 업무로 바뀌게 되어 팀의 매니저가 정규직 자리를 만들었다. 사무총장까지 새로 만든 자리를 허가하고, 인사팀의 행정절차 끝에 2020년 11월부터는 P2 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벌써 유엔과 국제기구에서만 5년간의 경험을 쌓게 되었다. 이때쯤 되니 계속 유엔에서 근무해야 하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다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최근 만나게 된 한국분 중에도 20대부터 국제기구에 취직을 해서 20년 넘게 장기근속을 하고 계신 분이 유엔에서 근무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을 주셨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셨는데 내게 국제기구는 워낙 오랜 시간에 거쳐 장기간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빠른 변화를 경험할 수는 없지만 잘 인내하고 버티면서 경력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또다시 다자협력이 빛을 발하는 시기에 나의 경험이 잘 쓰일 수 있다고 하셨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국제기구와 그 시스템에 대해 비판하고 금방 실증 내지만, 사실 국제기구는 장기간에 걸친 다른 변화를 추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법대 출신의 나의 박사 지도교수님도 자기는 문서화된 시스템 속에서의 변화가 장기적으로 더 지속가능하고 때로는 국내법에까지 반영되는 변화까지 만들어 내기 때문에, MSF 보다는 WHO의 방식이 자신과 더 잘 맞다고 했다.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아직도 나는 유엔의 시스템이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엔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 상사들, 그리고 협력하는 지역이나 국가 사무소 혹은 다른 유엔 기구들에 대한 답답한 마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국제기구의 존재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비효율성과 불가피한 필요성 사이, 국제기구는 사기업처럼 완전히 효율적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규범과 국제협력을 위해서는 있어야 하는 불가피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행히 5년 간의 근무 끝에 잠시 새로운 도전으로 당분간은 유엔 시스템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만, 앞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국제기구가 비효율적이고 느린 건 실무직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은 이유도 있는 것 같다. WHO 스위스 제네바 본부의 정규직 직원 평균 연령은 40대 중반이다. 그 이유는 전문적인 일들을 하기 때문에 오랜 기간의 실무 경력과 다양한 경험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과 의견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실제 회의를 기획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진행하는 건 주니어급 실무진들을 더 많이 뽑아서 맡길 수도 있지 않을까. 사기업처럼 국제기구도 효율적이고 창의적으로 의미 있는 아웃풋을 내는 기업 문화로 바뀔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찌 되었건, 나의 20대의 5년간의 경험은 너무나 소중했고, 더 늦지 않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나의 커리어와 공부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앞으로 어디서 일하던, 처음 유엔에서 일할 때의 설렘과 초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국제기구의 비효율성과 한계는 인정하지만,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이 국제기구에 더 많아지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