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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 Oct 31. 2020

지구촌 이태원

이태원의 역사_18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세계음식거리의 탄생 


그전에는 모든 위주가 상가 중심으로 발전됐다고 보면 돼요. 음식점이나 그런 게 있을 수 없었지. 뒤에 거기(현 세계음식거리)도 거의 다 한국음식점이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구 음식점들이 들어선 건데, 상대적으로 물건 파는 쇼핑센터가 줄면서 풍선효과 알죠? 한쪽을 누르니까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는 거, 그러면서 음식점들이 생기는 현상이 생긴 거죠. 이런 것들이 119-28번지(해밀턴호텔)를 중심으로 음식점 거리가 생긴 거죠. 그때부터 정부 지원도 대대적으로 들어오고.       
장태진, 남, 59세

  

현재 이태원의 문화적 이질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외국음식점들은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태원에서 그리 주목받던 요소는 아니었다. 이는 2000년대 이전까지 이태원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대부분 미군이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이후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지역의 성격은 변화해 갔지만, 관광객은 이태원에 머무는 존재가 아닌 스쳐 지나가는 존재였기 때문에 거주자의 비중에서는 여전히 미군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미군의 경우 부대 내 주거시설이 잘 되어 있었던 덕에, 이태원에는 이들을 위한 유흥공간과 쇼핑공간은 있었지만 이들을 위한 요식업상권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관광객의 경우에도 이태원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던 탓에 이들을 위한 요식업 상권 또한 발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관광객은 한식을 더 선호했는데, 이들은 관광으로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한국 문화를 경험하는 차원에서 한식을 찾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2000년대 후반까지 해밀턴호텔 뒷길에 한국식 구이전문점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런 추론을 뒷받침해준다. 


경향신문| 1997.10. 22.  “입맛 돋우는 '외국음식점' 4곳”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태원에 외국음식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이태원에 외국음식점이 있긴 했지만 소규모로 여기저기 산재했을 뿐이다. 위의 기사 사진을 보면 1980년대부터 형성된 식당들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들은 비교적 고급 식당들로 이태원 인근에 자리한 대사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식당이 자리한 위치는 호텔 안이나 인근 혹은 대사관이 몰려있는 곳과 가까이에 있다. 이런 외국음식점들은 1990년대까지는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다가 2000년대 이후 이태원에 들어온 새로운 외국인에 의해 외국음식점의 수가 많아지자 점차 주목을 받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이주노동을 위해 유입된 외국인들은 이태원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슬람중앙사원 인근으로는 이슬람국가 출신의 외국인노동자와 중국계 노동자가 모여들었고, 이태원2동 경리단 인근으로는 다양한 국적의 영어강사가 모여들었다.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구성원 차원에서 이태원의 특성을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이태원의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는 데도 기여하게 된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미군이 아닌 외국인의 비중이 빠른 속도로 늘면서 이태원에는 이들을 위한 외국음식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과거의 외국인 관광객과 달리 장기간 이태원에 머무는 사람들로, 이질적인 한식보다는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본국의 음식을 필요로 했기에 자연스레 이들을 주고객으로 삼는 외국음식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에 형성된 음식점은 한곳에 몰려있는 형태가 아닌 거주지 별로 특성에 맞게 산발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이슬람중앙사원 인근에는 초기에는 중국인을 위한 중국 식자재 상점이 있다가 점점 무슬림을 위한 할랄 음식점이 늘어났고, 영어 강사들이 자리한 경리단 인근에는 수제버거나 타코, 피자가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이태원 곳곳에 외국음식점들이 늘어나자 해밀턴 뒷골목에도 대사관 사람들이나 상사 주재원들을 위한 고급 레스토랑과 외국인 강사들을 위한 스포츠펍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당시 의류상권이 쇠락해가면서 의류상권을 위한 가내공장과 창고들이 자리해 있던 해밀턴호텔 뒷골목이 비워지고 있던 상태였던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리고 이처럼 산발적으로 분포해 있던 외국음식점이 지하철의 개통 이후 이태원을 찾기 시작한 한국인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이태원은 한국인에게도 쇼핑과 유흥을 넘어 외국 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새로 얻게 된 요식업과 관련된 이미지를 용산구에서 활용하게 되면서 이태원은 본격적으로 세계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마치 1980년대 성장하던 이태원 의류상권을 88올림픽을 대비한 관광쇼핑지로 개발한 것처럼 말이다. 음식점과 관련된 개발 방향은 앞서 살펴본 관광특구지정 이후 꾸준히 제안되어 오던 것이었다. 이태원을 보다 복합적인 관광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음식점 개발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여겨졌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음식점거리는 이화시장에 조성될 것으로 계획됐지만, 2010년대에 들어 세계음식거리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이화시장이 아닌 해밀턴호텔 뒷골목의 이면도로였다. 이곳은 2010년까지도 이면도로가 아닌 한 측면이 막혀 차량의 통행이 제한된 골목길에 불과했는데, 지구단위계획의 시행 과정에서 길을 뚫고 이면도로가 되면서 세계음식거리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서울시와 용산구의 계획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의류상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상인연합회(이후 상인회)의 의견이 크게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요식업의 부상을 통해 이태원을 재활성화시킴으로써 의류상권 또한 다시 한번 활기를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 차 없는 거리 만들고, 도로 까내고 돌로 다시 예쁘게 깔았잖아. 그거 다 관광특구연합회에서 한 거야. 나라에서 한 게 아니야. 우리가 전봇대도 묻어 달라 그러고. 거기 지금 이름이 세계음식거리잖아 그것도 우리가 지어서 붙인 거야.    
 장태진, 남, 59세 


2010년쯤이 되면 이태원의 의류상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영역이 쇠락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때문에 의류상권의 상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상인회는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고, 그러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세계음식거리의 형성이었다. 이후 이들의 의도와 달리 세계음식거리가 활성화됨에도 의류상권은 쇠락해가는 모순이 발생하지만 초기에 이들이 세계음식거리에 형성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요식업 상권과의 상생을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음식점거리가 이화시장이 아닌 해밀턴호텔 뒷골목에 위치하게 된 것도 이와 관련된다. 음식점거리의 조성을 통해 의류상권도 이득을 보아야 했기 때문에 새로 형성될 요식업 상권은 의류상권가 가까울 필요가 있었다. 마침 공장들이 들어서 있던 해밀턴호텔 뒷골목은 의류상권의 쇠락으로 비어져 가던 차였고, 그 자리를 이미 몇몇 음식점들이 채워가고 있었다. 상인들은 이를 활용했고, 그렇게 2013년 이태원에는 ‘세계음식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요식업상권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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