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의 역사_19
이 글은 필자의 석사 논문인 『문화적 엔클레이브 이태원의 한국인 상인들』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다 대중적으로 이태원의 역사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논문이 가진 학술적인 측면은 축소하고 인간 중심의 역사적 서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태원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고유의 색을 잃지 않는 이태원이라는 이국적 공간, 그리고 그곳이 터전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태원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국적인 공간이 되었고 이국성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에 대해 그려볼 생각입니다.
서울신문 | 2012.11.02
"이태원 세계음식 특화거리 만든다. 용산구, 510m 구간 추진… 30여國 음식점·상점 연계"
용산구 이태원관광특구에 지구촌 음식을 만날 수 있는 특화거리가 조성된다. 용산구는 이태원 지역 상권 활성화와 관광 콘텐츠 육성을 위해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편 510여m를 ‘세계음식 특화거리’로 꾸미기로 했다고 1일 밝혔다. 특히 해밀턴 호텔 뒤 300m 메인거리와 210m가량의 연결도로에는 현재 30여 개국의 음식과 각종 상품 등을 파는 이국적인 상점이 들어서 있다. 구는 지난 8월 초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와 면담을 갖고 이 지역의 기존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특화거리를 조성하기로 했다.
여기서 식당을 내려고 했던 건, 피자 파스타 햄버거를 제외한 진짜 제대로 된 외국음식을 먹으려면 아무래도 이태원만 한 곳이 없으니까 처음부터 이태원만 생각했지. 그 당시 상권이 형성되는 시기여서 그런 것도 맞아 떨어져서 였지.
이영은, 여, 31세(스페인식당 운영)
상인회의 노력과 용산구의 지구단위계획이 결합하면서 이태원은 이제 사람들에게 쇼핑보다는 외국음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지되기 시작한다. 이미 의류상권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줄어든 지 오래였던 반면, 외국음식을 먹기 위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다른 지역의 한국인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유명세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외국음식점이 이태원으로 유입됐다. 많은 이들이 진정한 외국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이태원만한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국음식을 선보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태원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이태원에는 외국음식점을 차리고자하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노동자로 한국에 들어와 동향사람에게 고향의 음식을 제공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이태원이 새롭게 갖게 된 특성에 이끌려 이태원에 들어온 이들은 음식을 통해 이태원의 이국성을 재생산해 내며 지역의 특성을 강화시키는 존재가 되어갔다. 마치 20년 전 이태원에 유입되었던 세일즈들 처럼 말이다.
이태원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국적의 외국음식점이 자리하게 되었고, 세계음식거리는 이태원의 이국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으로서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가게 된다. 이제 이태원은 요식업상권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과거 의류상권이 성장함에 따라 이태원의 여타영역이 변화했던 것처럼 이제 외국음식점이 이태원 전역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상권의 범위가 확장되고 규모도 커지게 되었다. 요식업 상권이 상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공간들을 점유해가면서 이태원 상업공간의 규모 자체가 넓어지게 된 것이었다. 과거 대로변만을 중심으로 상권이 자리했다면, 이제는 골목에 있던 미용실, 슈퍼, 세탁소 등이 자리했던 근린상권과 주변에 자리했던 주택가마저 용도를 변경해 식당이 되었다. 이제 이태원 어디서든 외국음식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의류상권이 기지촌을 넘어 국제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면, 2000년대에 형성된 요식업상권은 과거보다 계층적, 종교적, 민족적으로 보다 다양화된 이태원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더 이상 미군이나 외국인 관광객은 없었으나 외국인이 직접 만들어 내는 본토의 음식 그리고 새로 유입된 한국인 상인이 선보이는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이태원의 이국성을 생산해 냈다. 음식은 계층, 종교, 민족에 국한되지 않은 문화를 보여주는 매체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변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차이는 이태원이 새롭게 표현하는 이국성이 과거와 달리 하나의 매력 요소로써 한국인의 발길을 끌었다는 점이다. 음식을 통해 표현되는 이국성과 다양성을 경험하기 위해 한국인의 유입이 증가하면서 이태원은 이제 외국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주류사회의 구성원인 한국인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히 ‘지구촌’이라 불릴만한 모습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태원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번에 겪고 있는 변화가 이태원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변화가 그러했듯 현재 이태원이 겪고 있는 변화 또한 지역이 거쳐 온 역사 위에 펼쳐질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어떠한 삶 혹은 문화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그 공간 자체의 문화가 완전히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현재 이태원이 음식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특성이 과거처럼 유일하고 직접적인 형태로 다른 지역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태원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고유의 이국성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이태원은 과거의 그것과는 다르고 또 같다. 어쩌면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 모를 이태원의 미래를 이 글을 통해 한 번쯤은 기대해 볼 수 있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