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의 밤

by 고경석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듭니다 "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



1.

“나 모르겠어?”

금요일 밤마다 낯선 여자들이 연우를 찾아와 아는 체했고, 연우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모르겠는데요”


2.

낯선 여자들 방문은 세상을 물바다로 끝장낼 것 같았던 지난여름 장마가 끝난 직후였다. 폭우가 거세게 내리던 밤을 지나 그다음 돌아오는 금요일부터였는데 연우가 이처럼 폭우가 내리던 밤을 콕 집었던 이유는 그날에 벌어진 사고 때문이었다. 강물과 인접한 제방 일부가 아래로 푹 꺼지더니 순식간에 불어난 강물로 차 한 대가 휩쓸렸던 그 밤에.


사고가 일어났던 금요일, 그 밤에 어김없이 카페 주차장을 찾던 차 한 대가 있었다. 어두운 밤이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짙은 갈색의 승용차였으리라. 찰나의 순간에 연우의 시야에 잡힌 bmw는 차창이 온통 까맣게 선팅이 돼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내부를 볼 수 없었던 사실이 연우에겐 다행이었다. 만약 차창을 통해 차 안의 사람을 목격했다면 연우는 안타까움과 충격 속에서 오랜 시간 악몽에 시달릴 수도 있으니까. 차가 범람하던 강물 속으로 미끄러질 때 차 뒤에 부착된 bmw라는 엠블럼이 연우의 시선을 스쳐갔을 뿐이었다.


3.

그 후 뇌리에 남는 건 금요일 밤마다 주차장을 찾았던 bmw의 행적이었다. bmw는 카페 주차장 한 자리를 원래부터 자기 소유인 양 차지했다. 주차장에 빈자리가 있기에 차 한 대의 행위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비난할 마음은 없다. 문제는 행적에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는 점이다. bmw는 자리만 차지했을 뿐 아무런 미동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카페가 하루 영업을 끝내기 직전에 홀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우는 진작에 bmw 존재를 인지했지만 주차장 일부를 무단 점유하는 것에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bmw가 주차장에 나타나는 건 습관처럼 대부분 밤 아홉 시가 넘은 후였다. 카페가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강변에 있었기에 낮 시간에도 주차장은 여유로웠다. 하물며 늦은 밤이면 더 말할 것도 없겠다. bmw 차주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지 않는다 해도 연우는 그냥 잠자코 있으리라. 금요일 밤이면 나타났다 사라지는 bmw. 약간 자의적 상상력을 보탠다면 금요일 밤 강가 주차장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떠나는 염치없는 bmw. 요 정도로 감정선을 정리하고 bmw를 용인했었다.


4.

여름과 함께 찾아온 장마는 여름이 마저 지나가는 가을 길목에서 퇴장을 알렸다. 아침나절 강변에 청명한 가을이 얼굴을 빠금 내민 듯싶었지만 카페 주차장은 여름날의 상흔이 앙탈을 부리는 무더위와 여전히 남아 있다. 붕괴된 제방을 응급복구 했어도 피부가 벗겨진 속살처럼 까만 흙들과 나무뿌리들이 노출된 터라 전반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보도블록과 아스팔트가 깔린 정돈된 주차장을 되찾기까지 시일이 걸릴 것이다. 여름 장마는 카페 주차장뿐만 아니라 이 일대를 넘어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남겼다. 더구나 이곳 카페는 외진 곳이라 복구조차 후순위에 밀릴 게 틀림없다. 여차하면 자비를 들여서 복구해야 될지도 모를 판국이었다.


무엇보다도 연우를 자극하는 건 생면부지 여자들이 금요일 밤에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아는 체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카페를 찾는 여자들이 금요일 밤에만 국한되진 않았다. 월요일이든 화요일이든 일주일 중에 아무 때나 친구 아니면 연인과 함께 카페를 찾는 여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금요일 밤 여자들이 이상한 점은 공통적으로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나 모르겠어?"


여자들은 대체로 이십 대 중반은 넘었고 어떤 날은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도 있었다. 처음엔 여자들이 단골인가 싶다가 단골이 아니라도 한 번 정도는 카페를 찾았던 손님인가 싶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짜도 모르는 여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다못해 자신한테 벌써 치매가 찾아왔나 쓴웃음 짓기까지 했다. 코앞에서 여자가 ‘나 모르겠어?’ 할 때마다 ‘모르겠는데요.' 대답하는 건 주인이라는 작자가 손님 앞에서 매번 할 소리는 아니었다.


“모르겠는데요”


낯선 여자 앞에서 입버릇처럼 대꾸한 이 한마디는 일상적인 표현으로 끝날 사안은 아니다. 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주인의 송구함이 담겨 있어 처음엔 안타까운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누군가 여자들을 사주해 장난치는 게 아닌가 의구심마저 들었다. 게다가 유독 금요일 밤이면 처음 보는 여자들이 자신을 아는 체한다는 사실에 점차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5.

금요일 밤 상황에 너무 집착해 정신과 전문의 상담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나. 이 시점에서 기억의 왜곡을 거쳐 안면이 있다며 접근하는 여자들에 대해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쩌면 망각 속으로 흩뿌려진 지난날 연우가 남긴 흔적들, 아니면 닮은 사람으로 착각했던 여자들 아둔한 눈썰미를 탓하면서 적당한 타협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지만 허점 투성이다. 돌이켜보면 연우는 여자들과 친분을 쌓는 것에 경직될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아는 여자는 손에 꼽을 만큼 극소수라 누군가 아는 체했다면 단박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금요일 밤 연우를 찾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닌 것은 둘째치고 대부분 처음 보는 여자들이란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우연 치고는 너무 남발이 되는 우연이었기에 닮은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논리도 신빙성이 떨어졌다. 혼란스럽다. 이 모든 일이 폭우가 내렸던 금요일 밤 이후에 연우에게 닥쳤다.


금요일 오늘, 강변 아침에 강물 따라 금빛 윤슬이 반짝였고 살짝 시선을 돌리면 요 근래 느끼던 묘한 기운도 적막한 카페로 스며들었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