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6.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과 두 가지 기억

by 황정현

다가가고 또 다가오는 것들


수수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붉은 꽃무늬 원피스, 그리고 알 수 없는 책 한 권을 손에 든 여자가 혼자 언덕에 올라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분명 햇살은 따뜻하고 사방은 고요하며 풀내음과 바람이 그녀를 감싸고 있을 것이다. 이 포스터 한 컷에 매료되어 몇 주 전부터 책상 앞에 붙여두고 개봉날만 기다렸던 본 영화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고정관념인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영화답게 품고 있는 묵중한 주제에 비해 참 맥없이 끝나버린다. 그렇지만 늘 삶 그 자체와 사람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는 이런 영화들이 난 좋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구절들이었고, 또 하나는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해발 5000m 높이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연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김가람 님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곳에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해발 5000m 히말라야 산맥에 피아노를 옮겨 연주회를 연 김가람 님은 말했다. 그녀는 이전까지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향해 열심히 다가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히말라야 산맥의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기진맥진한 탓인지 이상한 착시를 느낀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다다르길 원했던 그 목적지가 마치 자신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젊음과 사랑, 일, 신념, 일상, 부딪힘, 이혼, 죽음, 외로움, 분노, 새로운 만남 등. 영화 속 나탈리에게도 많은 사건들과 생각들이 다가온다. 아니 나탈리는 그것들을 향해 다가간다. 여느 로맨스나 드라마, 액션 영화에서처럼 가슴 조리는 극적인 사건과 명쾌한 해결은 없지만 어쩌면은 크고 또 어쩌면은 작은 사건들이 다가오고, 또 그것을 향해 나탈리는 다가간다. 영화'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과 황지우 님의 시, 피아니스트 김가람 님의 이야기가 모두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삶의 모든 일이 나 혼자만의 힘으로 애써서 다가가야만 하는 것만 같지만, 사실 그 무언가의 힘에 의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 사실은 원하는 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그리고 무엇이 다가올지 모르는 삶 한가운데의 우리를 좀 더 긴장시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가올 것은 반드시 다가오니 마음을 좀 내려놓고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다가가도 좋다고 말하는 듯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