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읽으려는 그 마음과 수많은 빗나감의 시도들
나는 늘 내가 알고 있는 느낌과 나의 기준대로 이해받길 원했다.
'왜 아무도 날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고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았다.
하야마 아마리,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中
어릴 적 그렸던 '사랑'은 내가 초콜릿을 원하면, 초콜릿에 더해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내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죽도록 먹고 싶다 말했을 때 조건 불문, 그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다. 받는 것, 그러니까 충분히 받고도 넉넉한 그 마음이 사랑이라 의심치 않았다. 이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적용됐다. 상대방에게 충분히 주고도 더 주는 넉넉한 그 마음이 사랑이라 여겼다.
스물아홉, 조금은 자란 나는 이제 사랑이라도 초콜릿 아이스크림은커녕 초콜릿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오히려 더 나쁜 것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모든 것이 다 긍정적인 그런 최고의 가치가 사랑이라고들 말한다. 얼마 전까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지만, 이제 나는 재귀적 성찰의 필요성을 느낀다.
사랑이 가진 속성은 긍정적이지만, 사실 사랑은 양날의 칼이자 양의 탈을 쓴 늑대 혹은 늑대의 탈을 쓴 양 같은 관념 같다. 그러니 더더욱 문장이 아니라 행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드러나고 관찰되는 현상이 아니라 그 안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세밀하게 해독해내야 한다.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해도, 초콜릿이 아니라 쓴 약을 줄지라도 그것이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원하는 초콜릿이 아닌 눈물겹게 쓴 약을 줄지라도 사랑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서로가 던지는 달콤한 사랑의 몸짓과 말이 아니라 서로의 행간을 읽으려는 그 마음과 수많은 빗나감의 시도와 수고들이 사랑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세상 일 중 '사'자 들어가는 모든 것은 다 쉽지 않다. 그중 사람과 사랑도 역시나 어렵다.
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말> 中